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Mar 20. 2023

"여러분은 남편을 갈망하세요?"

창세기를 다시 읽다

얼마 전 성서모임이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이번 모임에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부분을 읽고 각자 느낀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맞은편에 앉은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와가 아담을 유혹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는 부분이 난 너무 싫더라고요. 남자는 평생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어야 하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는 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이 구절이요. 저는 우리 남편 갈망하지 않거든요. 여러분은 갈망하세요? "

그분의 질문을 계기로 잠시 지난 결혼생활을 돌아보았다. 우선 '갈망'이라는 말뜻은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듯이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다. 내가 '남편을 갈망'했었나 생각해 보니 그를 갈망했다기보다 가두려고 했었던 것 게 아닐까 싶었다. 예를 들어 술자리가 너무 잦거나 술을 마시고 너무 늦게 들어은 날엔 대부분 다툼이 있었다. 육식을 줄이고 담배를 끊어라, 운동을 시작해라 등등 잔소리를 꽤나 하고 살았다. 이런 것들은 남편의 건강과 직결되어서였지만 그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이유 중에는 그가 건강해야 더 오랫동안 돈을 벌어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하다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남편은 내가 괸리해야하는 자산목록 1순위였다.


만약 남자가 아이를 낳았다면

당신도 돈을 벌어야 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나도 결혼 전엔 남편못지않게 벌었었고 결혼 후에도 계속 벌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일하던 업종은 밤샘작업이 많아서 현실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계속 일하기는 어려웠다. 우린 결혼하면서 아이를 둘 정도 가지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진 내가 퇴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직장은 신생 방송국이었고 임신한 여성은 0명, 우리 부서의 직속상사는 30대의 미혼 여성과 남성 각 1명씩과 40대 기혼 남성이었다. 난 우리 부서 최초의 기혼 여성이 되었고 생각보다 빨리 임신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경력을 쌓은 상태에서 휴직을 해야 부서 내 입지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남편과 나는 깊은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아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자주 밤을 새우며 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다음 해에 신입 사원이 충원되었는데 모두 남자들이었다. 무거운 카메라도 들 수 있고 밤샘 근무도 문제 되지 않는 20대 남자후배에게 내가 하던 일들이 조금씩 넘어갔고 내 상사였던 30대 팀장은 이미 혼자 프로그램을 만들어 오던 나를 제쳐두고 별개의 팀을 꾸려 신입 남성에게 열심히 취재와 편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임산을 했을 때 회사에는 알리지 않았었지만 내가 업무에서 정책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창립멤버로 야근과 밤샘근무를 밥먹듯이 하며 회사가 자리 잡는 데 애썼던 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나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뀐 회사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 회사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다닐 수는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 비인간적인 회사를 계속 다니려고 또 아이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아이를 낳아 몇 년 키우고 나서 방송작가로 다시 취업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퇴사를 했다.

만약 임신을 하고 출산을 담당하는 쪽이 남자였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 본다. 우리 부서에 충원된 신입사원은 당연히 남자가 아닌 여자였을 것이고 30대였던 직속상사가 결혼을 하고 출산휴가를 쓰는 사이 그가 해오던 부서의 업무를 내가 맡았을 것이다. 그즈음 우리 남편 역시 임신을 하고 출산휴가를 냈을 것이고 나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초과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회사일에 매달렸을 것이다.


집에 머문다는 것

20시간 산고 끝에 태어난 첫째 아이는 밤낮이 바뀌어 나는 밤새도록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몇 달 동안 세 시간 이상 연달아 잠을 자지 못했었다. 낮에는 밀려드는 집안일을 하고 아이에게 먹일 젖을 내기 위해 끼니때마다 국과 밥과 과일을 잔뜩 차려놓고 평소의 두 배를  먹어치웠다. 먹고, 먹이고, 치우다가 운 좋게 아이가 잠깐 잠들면 드디어 혼자가 된 그 시간이 너무 설레어 집안을 돌아다니며 서성댔다. 그러다 아침에 배달온 종이신문을 햇살 아래 펼쳐놓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곤 했는데 신문을 읽고 있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다시 '내'가 된 것 같았다.

당시에 남편은 진심으로 육아에  동참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가 8시 이후에 귀가하는 날엔 혼자 아이를 보느라 완전히 방전되어 버렸다. 남편의 시간과 퇴근 후 동선을 '관리'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이를 돌보며 집에 머문다는 건 내게도 너무 낯선 나를 남에게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마사초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브랑카치.예배당, 피렌체

여기서 창세기 3장 16절,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이 구절을 나의 목소리로 다시 말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나는 남편을 갈망한 것아 아니라 나를 육아에서 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남편의 일손을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오랫동안 돈도 벌고 집안일 앞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나의 동지가 되어주었다. 우린 수없이 많이 싸우고 절망했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우리 삶을 꾸려갈 믿을만하고 유용한 삶의 기준을 만들어왔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일치하지 않을 각자의 고유함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열쇠일지 모른다.


루카스 크라나흐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 1530. 빈 자연사 박물관



매거진의 이전글 조용하고 은밀하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