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름 뒤면 2023년이 다 가고 2024년이 시작됩니다. 문득 2000년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남편과 함께 광화문에 나가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새 천년을 맞이했던 1999년 12월 31일이 생각납니다. 발 디딜 틈 없던 인파 속에서 두 살 배기 딸을 목마 태운 남편과 나는 "5, 4, 3, 2, 1!" 숫자를 외치고서 터지는 폭죽소리에 맞춰 얼싸안고 제자리에서 뛰었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마구 축하인사를 했더랬습니다. 그땐 어떤 세리머니로도 2000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감격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또 그렇게 새로 선물 받은 은쟁반 같았던 2000년에 23년이라는 시간이 쌓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지나고 보니 그건 나이 한 살 더 먹는 평범한 일일 뿐이었지만,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목이 터져라 새천년을 불러젖혔던 밤을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건 새로운 세상을 환영하고 기대하는 한바탕 축제였으니까요.
그다음 해 둘째가 태어난 뒤로 저는 지금까지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십 대부터 30년째 직장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남편을 보면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합니다만, 똑같은 세월 동안 일과 휴식의 경계도 없이, 어떤 사회적 보상도 없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책임져온 저에게도 진심 어린 인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는, 따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주부로 사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나는 이런 하루를 살게 되었는가. 아이들의 성적에 따라 화가 났다가 견딜만해졌다 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고, 집이 아닌 '직장'에서 나의 능력과 쓸모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문득, '언제까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할 것인가'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탬이 되거나,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게 자식을 잘 키우거나, 누군가에게 건넬 명함 한 장 정도는 있는 사람이 되어있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이제 지긋지긋해지더군요.
생각해 보니 몇 년 전 잠깐 사업을 했을 때도 나의 쓸모를 묻는 내면의 목소리는 쉰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하느라 생긴 엄마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꿀 것인지 묻는 질문에 매일의 일상으로 성실하게 답하고자 했습니다. 요즘은 과연 그것이 나에게 던질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기 싫다는 이유로 내게 주어진 역할을 내팽개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오히려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조차 습관적으로 남들을 챙기는 데 끌어다 쓰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도, 뭔가 '자기 계발'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어딘가를 여행을 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다 바람직하고 나름 용기가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하루를 보내든, 어떤 한 해를 보내든 스스로의 판단을 온전히 믿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빠뜨린 것이 있지는 않을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지 초조하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다그침으로는 뚫고 나가지 못할 새로운 벽 앞에 서있습니다. 아무리 알차게 하루를 계획하고 모두 다 실행해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고,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더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게 된다면 그 답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질문을 만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이번에는 다그치지 않고 스무고개 하듯 찾아볼 생각입니다.
오래된 것일수록 값어치 없어지고 오로지 새것만이 각광받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늙어감이 인생의 가장 큰 리스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젊게 사는 것에 집착하지만 이미 주위는 노인들로 가득합니다. 늙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일단 내 나름대로 늙어갈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늙어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기도 하고 때로 놓기도 하면서요.
우린 새로운 쓰임으로 업데이트 되어야할 부품들이 아니라 그냥 나대로 늙어갈 자유를 누려야 할 존재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