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해외에 있는 큰 딸로부터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와인을 예약해 두었다는 메시지를 받고서 낮에 '한스케이크'와 '뱅가드 와인 머천트'에 가서 선물을 찾아왔다. 남편과 둘이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좀 적적했으나 이렇게 한갓진 일상도 다음 달 작은 딸이 귀국하면 막이 내린다. 남편과 넷플로 독일 영화 '파라다이스'를 보고 난 후, 캐럴을 들으며 케이크와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가져와 올해 우리 집 10대 사건을 적어 벽에 붙여두었는데, 적다 보니 올해의 화두는 단연 각자의 '독립'이었다. 가족이 만들어지고 난 후 한 동안은 아주 밀착해서 서로 의지하며 돌보고 키워주는 관계가 지속되다가, 2023년에 우린 서로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지금껏 우리는 자식의 보호자였으므로 의지하는 쪽은 당연히 자식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부모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동안 아이들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50대는 20년 간 만들어져 온 부모라는 정체성이 변화되는 시기이자 거기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올해는 두 딸이 한국에 있지 않아서 체감상 그 시기가 더 빨리 당겨진 것 같다. 솔직히 긴 돌봄의 시간에서 벗어난 이 자유를 마음속으로 학수고대했던 만큼,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남편과 단출하게 지내는 일상에 만족도가 꽤 높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늘 가족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던 날이 되면, 영상통화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를 보기 위해 밤 10시쯤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셀카봉을 든 관광객들과 아기를 품에 안고 온 젊은 부부들, 팔짱을 낀 연인들로 술렁였고 뒤쪽 성모동산과 화단에는 수많은 꼬마전구가 환하게 밝혀져있었다. 12시에 시작하는 성탄미사는 진즉 입장이 마감되었고,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빈자리를 기다리는 긴 줄을 보고서 나는 일찌감치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밖에서 10시 반에 시작한다는 구유예식을 기다렸다. 광장 입구에 마련된 구유 안에는 새끼 양들과 마리아와 요셉이 아직 비어있는 구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말구유는 춥고 누추하지만 소중한 존재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2023.12.24 명동성당
2023년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한 해는 아니었다. 절벽 앞에 선 듯한 느낌이 드는 때도 있었고, 고립무원의 단절감도 자주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자연스레 묵주를 손에 쥐고서 내가 가고 싶은 가깝거나 먼 미래를 꿈꾸었다. 되돌아보니 무언가를 기다리고 상상했던 그 시간이 올해를 값지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이 다가오기를 청하는 시간은 간절하긴 하지만 자유롭지 못했는데,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나는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원했던 많은 것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나름대로 즐거울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두 딸들이 각자 영상통화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했다. 환하고 싱그러운 표정에 내 마음도 기쁨이 번진다. 떠나가는 자식이라 생각하면 허전하고 서운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기쁘고 대견하다.
이제 '부모 vs 자식'이라는 익숙한 틀이 만들어내는 뻔한 감정과 기대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제 내 앞에 펼쳐질 시간은 부모의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시간이길 바란다. 그걸 바꾸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자 내가 누릴 몫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