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건 '운'의 영역이지만 누군가를 오랫동안 사랑한다는 건 능력의 영역이다. 사랑받은 세월의 길이가 사랑의 깊이와 일치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로 엄마가 된 지 이십칠 년이 되어간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빨고 걸음마와 글을 가르쳤고, 잠을 안 자고 버티는 법과 내키지 않는 자리에 가서 머물거나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선생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일이라면 몸도 마음도 아끼지 않을 수 있었던 동기는 엄마로서의 책임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딸들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50세쯤 되었을 때, 은연중에 이 정도 살았으니 세상에 대해 꽤 많이 안다고 자부했었다. 그래서 다가올 시간은 익숙한 물에서 수영하듯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는데, 그러기에는 내가 '사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걸 해를 넘길수록 절감하는 중이다. 특히 나이 듦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까운 환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나는 민주화 과정과 고도 경제성장기를 통과한 X세대답게,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한국 사회에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우리 가족 구성원이 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스스로 몰아세우며 고군분투했다. '함께 잘살아야 한다'라고 믿었던 세계관과 '루저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경쟁심이 공존했으니 몸과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그렇게 사반세기가 지나고 나자 마침내 대한민국 학부모의 역할에서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경력이 될만한 사회생활 없이 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는 혈연이거나 대부분 아이들과 관련된 인연들이었다. 대개 10년에서 20년 이상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소중한 인연들이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들과의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말실수에서부터 정치성향의 차이까지 원인은 다양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놀람이나 비아냥, 혹은 연락 두절로 이어졌다.
때마침 이어진 21세기 초유의 팬데믹은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었던 인간관계를 손절하기에 아주 적절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당시 유튜브에는 '모든 생명은 이어져있다'는 인문학 동영상이 도배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손절'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2년 뒤 '거리 두기가 곧 이웃 사랑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사라졌지만 어느새 나는 사람과의 대화보다 유튜브 시청을 더 선호하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나이 들수록 혼자 지내야 하는 이유', '이런 사람과는 반드시 손절해라',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 등등 유튜브 알고리즘은 인간관계로 번민하는 내게 온갖 아양을 떨듯 매일 새로운 영상을 올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조차 시들해지자AI가 '손절'을 권하는 영상을 듣느니 차라리 강아지하고 산책을 한번 더 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작년 말 약속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못 나온다고 연락온 친구와 두 달째 냉랭하게 지내다 오늘에서야 긴 통화를 하게 되었다. 친구는 내게 조금 의외의 말을 했다. 나를 편한 친구로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어찌 우리의 관계가 한쪽의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져왔겠냐며, 종종 내 얘기를 듣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었다고 했다. 듣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애써도 놓치게 되는 관계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갈등이 생기고 나서 푸는 쪽보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참고 돌려 말하는 편이 더 익숙하다. 사실 적당한 양보와 평범한 사과를 주고받으며 대충 마무리하는 이유는 너그러워서라기보다 갈등이 귀찮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게 일어난 대부분의 갈등은 의미가 있든 없든 사소하게 취급되고 귀찮음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손절이 찾아왔다.
어떤 사람은 그만 만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또 어떤 갈등은 터뜨리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이 귀찮음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누군가와 '손절'한다는 건 그와 함께 했던 '나'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버림과 헤어짐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버림이 무관심과 방치의 결과라면 헤어짐은 사랑과 선택의 결과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사랑한다면 그건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사랑하는 능력 역시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가 한 번쯤 타인을 사랑해 본 경험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내가 타인을 사랑했던 방식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아온 방식과 몹시 닮아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랑은 유전이 되고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닐까. 다만 우리의 유전자가 각기 다르듯 사랑을 전하는 방식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고유한 것이라 고작 50년 남짓한 나의 경험만으로 단정 짓기엔 너무 큰 우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