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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r 27. 2023

나의 <바그다드 카페>로

사는 게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보게 되는 영화가 있었다.

남편이 맨날 술을 마시고 온다고 생각했던 시절(꽤 길었다),

전화해도 받지 않거나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 술냄새를 가득 풍기면서 들어올 때면 작은 풍선만 했던 불안이 나를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분노로 변해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20여 년가량 그랬었던 시절, 나는 아이들이 들고 오는 동화책을 읽어주며 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날도 있었고, 아이들을 책상 앞에 끌어다앉혀 놓고 초시계를 손에 든 채 그 날치 구몬수학을 풀리기도 했었다.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아마 그때 나는 이걸 왜 시키나 싶은 내 마음을 아이들에게 들킬까 봐 더욱 강경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유배된 시간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을 때(나는 아직도 '왕따'라는 말을 발음하기가 어렵다.) 갑자기 말수도 없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던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어느 캄캄한 밤에 아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은 이 세상의 어떤 밤보다도 캄캄했었다. 그리고 당장 달려가 버러지만도 못한 선생들 멱살이라도 잡지 못했던 내가 너무 싫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무서워했던 것일까. 공부 잘하고 권력 있는 부모를 둔 가해자를 감싸느라 바쁜 선생이라는 작자가 우리 아이를 더 교묘하게 괴롭힐까 두려워했고 피해자를 더 흘깃거리는 것 같은 동네의 분위기가 두려웠다. 우리에게서 이 악몽이 어서 지나가버리기를, 사춘기 아이들이 으레 겪고 지나 가는 흐릿한 통과의례쯤으로 남기를 바랐다.

외고, 자사고, 특목고를 많이 보내는 게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그 학교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아파트 옥상에서 학생들이 떨어졌었고, 그 끔찍한 뉴스를 접한 엄마들은 놀란 표정을 수습하고 다음 날이면 아파트값 떨어질까 봐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고 다녔다.

선생들도 학부모들도 그들이 왜 뛰어내렸는지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교장은 학생들에게 만약 언론사 기자들이 접근해서 이번 사건에 관해 물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리고 해외출장을 떠났다. 그 지옥에 있으면 나도 내 아이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그곳을 탈출했다. 떠날 때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던 이유는 내가 아무에게도 속사정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기로 했다. 묻지 않고 위로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런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만큼 괜찮지 않았다.  학부모모임을 하고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엄마들, 학원정보를 주고받던 엄마들, 커피를 마시며 누구네 집이 아파트를 사고팔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던 엄마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했고 이사를 하고 나서도 먼저 연락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괜찮아 보이느라 괜찮지 못했던 나

새 학교에 정착하고 간신히 한숨 돌리고 나자 옛 동네에서 절친이라고 믿어온 사람에게 내가 먼저 연락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이들의 입시계획과 그 동네의 근황, 학원비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삶이 빠져있는 뻔하고 익숙한 대화를 이어가면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는 게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화를 한 건지 연기를 한 건지. 사는 게 이런 건지 내가 이상한 방식을 고집하는 건지.

다행히 큰 아이는 새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잘 적응해 나갔는데 이번엔 작은 아이가 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생수가 적은 사립학교였는데 전학 오자마자 어울렸던 아이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따돌림 당하던 아이였다는 게 또 다른 따돌림의 원인이었다. 큰 아이 때 경험으로 친구들끼리 따돌리지 말고 잘 지내라고 한 것이 작은 아이가 적응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둘째는 한동안 아침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었고 나는 방과 후 집에 돌아온 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없었는지 마음 졸이며 지냈다.

 형제들에게도 친정엄마에게도 내 아이가 왕따 당해서 이사 왔다는 얘기를 터놓고 하지 못했었다. 도리어 "너희 아이들은 왜 그렇게 왕따를 당하지?"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고 도리어 그들에게 내가 별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줘야 할까 겁이 났다. 난 아이들과 하루하루 버티는 것 말고 누구를 원망할 힘도 미워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편은 이사하고 나서 술을 더 자주 많이 마셨다. 주말에 산에 올라갈 때도 팩소주를 가져가 마시고 내려온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날 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I'm calling you~~"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 혼자 천장이 낮은 2층 다락방에 올라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설거지도 청소도 안 하고 한나절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의 40대가 이럴 줄 몰랐다고 혼자 생각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펑펑 울고 싶었지만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혼자 장을 보고 오는 날도 있었다. 지금 같은 배달시스템이 없을 때였고 동네 마트보다 북적이는 재래시장을 걸으며 장을 보는 동안은 내가 불행하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사예보가 있었던 어느 봄날, 집에서 나와 그늘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바로 터널오 들어갔고 난 열린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등산 배낭을 멘 승객 두엇 밖에 없던 버스 안에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번지더니 갑자기 애끓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I'm calling you~~"

캄캄한 터널 안을 지나는 버스 안에는 물걸레 짜듯이 창자를 쥐어짜 내어 부르는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누런 먼지가 풀풀 날리는 사막에 서있던 주유소와 모텔과 카페가 생각났다. 무능한 남편을 내쫓고 카페 밖에 내놓은 낡은 소파에 널브러져 앉아 얼굴에 긴 강줄기를 내며 울던 여자 브랜디와 성질 더러운 남편과 여행하다 차밖으로 내쳐져 땀을 뻘뻘 흘리며 사막을 걷던 여자 야스민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버스 안에서, 내 표정이 어떤 날은 브랜디와 비슷했다가 어떤 날은 야스민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힘을 뺄 때와 줘야 할 때를 자주 틀려서 더 곤경에 처하곤 한다. 브랜디는 야스민의 진정 어린 마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쳐놓은 불행의 시나리오를 벗어나게 된다. 야스민의 진정 어린 마음이란 아무렇지 않은 일에 아무렇지 않게 웃을 줄 아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 같은 것이다. 쓰레기를 치우고 부메랑 날리기를 배우고 예쁜 옷을 빌려주고 맛있는 저녁을 먹는 일만으로 도 웃게 되는 거다. 그것만으로 웃을 수 있어야 괜찮게 살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내 전화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더 말할 것 없다.



https://youtu.be/oCLpLWcX2 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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