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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20. 2023

「오이디푸스 왕」

그리스비극 읽기

며칠 후면 동지다. 계절 나기를 등산에 비유하자면 지금은 겨울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있는 때다. 당분간 이어질 긴 밤에 몇 명이 모여 <그리스 비극>을 읽기로 했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알려진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중 대표작을 6주에 걸쳐 읽자는 계획이다.


먼저 소포크레스의 최고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오이디푸스 왕」. 워낙 많이 인용되었던 작품이라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희곡을 직접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이디푸스 왕

코린토스스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신탁을 피해 길을 떠나던 중, 반인반수인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된다. 그리고 선왕의 죽음으로 홀로 지내던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테바이원인 모를 역병이 창궐하자, 오이디푸스는 처남 크레온을 델포이로 보내 신탁을 받아오게 한다. 아폴론의 신탁은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잡아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는 것. 오이디푸스는 곧장 온 나라를 뒤져 범인을 잡고자 한다. 그러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설전 끝에 자신이 테바이의 왕이 되기 직전, 삼거리에서 홧김에 살해한 자가 선왕 라이오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래전 이오카스테 왕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갓난 아들을 킨테로스 산에 버리게 했지만, 결국 라이오스 왕은 아들의 손에 죽고 자신은 버린 아들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 테바이를 현명한 군주가 되고자 했던 오이디푸스 역시 부인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시신 옆에서 그녀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실명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알버트 그라이너, 1896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왕」에는 운명의 씨실과 날실을 자아낸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 왕비 이오카스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이디푸스,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델포이로 가 신탁을 받아온 처남 크레온.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파국을 가져온 책임은 없다. 오히려 예된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각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노력을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음과 실명, 그리고 근친상간이 가져간 혼돈은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비극이 주는 울림은 단순 슬픔에만 머물지 않다. 빛나는 지혜와 명예, 또 넘치는 부와 권력이 물거품처럼 스러지는 과정허망했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태도는 숭고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부인이자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에게 왜 자신을 버렸냐고 따지지 않았고, 이오카스테 역시 어떠한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혹은 실명으로 엄청난 파국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대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정말 인간에게는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이런 비극 앞에서도 과연 운명의 주인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이 선택한 결말에 이르러 잠시 혼란스러웠다.

오이디푸스에게 비극적 운명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 운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은 스스로 선택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비극적 운명을 감당하는 이들의 태도야말로 운명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문득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군사 반란에 맞서 끝까지 특전사령관을 지켰던 오진호(정해인 역) 소령은 반란군에게 포섭된 전우에게 사살당하고 만다. 극 중 오진호 소령의 실제 인물인 김오랑 소령의 시신 야산에 버려졌다가 삼 개월 뒤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친구가 쏜 총탄에 쓰러지고 결국 그 부인까지 실명 의문사에 이르렀지그들은 마지막까지 주인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살다 갔다.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준비된 운명을 기꺼이 감당할 용기를 뜻하는 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서울의 봄> 오진호 소령(정해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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