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건강관리공단에서 '장기요양 등급 심사' 날짜가 9.15에 잡혔다는 문자를 받고 오늘 오전 10시에 아버님과 요양원에서 뵙기로 했다.
음력 7월 *일.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며칠 전에 아버님의 생신은 병원에서 지나갔고 어머님의 생신은 오늘 요양원에서 지나간다.
건강관리공단에서 나온 젊은 심사원이 요양원에 도착해 로비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언제 골절 진단을 받았는지, 평소에 집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시고 활동하셨는지 자세히 묻고 기록했다. 그 사이 요양사가 끄는 휠체어에 탄 어머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오랜만에 목욕을 하셨는지 머리도 정돈되어 있고 깨끗해 보이긴 했지만 어쩐지 어머님의 표정까지 지워져 버린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아침에 사 온 작은 케이크에 초를 꽂은 다음 어머님 무릎에 올려드렸다.
" 어머니. 오늘 생신이에요. 여든네 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어르신. 이제, 후~하고 촛불 끄셔야지." 옆에 서있던 요양원 원장님이 어머님의 마스크를 내려주었다. 어머님은 입술을 모아 '후'하고 숨을 내쉬었지만 세 개의 촛불은 흔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도 마스크를 내리고 "어머니. 저랑 같이 불어요. 하나, 둘, 셋!" 하고 촛불을 껐다. 그리고 케이크가 올려진 다리 아래로 살과 근육이 다 빠진 어머니의 가느다란 종아리를 쓰다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든든한 나의 피난처이자 내 딸들에게 온갖 축복의 말로 요새를 지어주셨던 분.
나는 '틀림없이 잘 될 거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동아줄처럼 잡고, 한때 나와 아이들을 집어삼키려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왔다. 이제 어머니는 케이크 위의 촛불 하나 끄지도 못할 만큼 힘이 없으시니 우리에게 더 이상 축복의 말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머님과 지내온 시간 가운데는 감사함보다 부담으로 다가오는 '희생'도 있었고, 당신의 아들이자 나의 배우자인 한 남자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는 듯한 집착이 엿보이는 때도 있었다.
오랜 애증의 시간 끝에 그래도 내게 또렷이 남은 것은 그녀에게 받았던 '사랑과 축복'이다. 어머니는 열 살 즈음 6.25 전쟁을 겪고 남쪽에 와 뿌리를 내려야 했던 힘겨운 세월을 살아오셨으니 '사랑'이나 '축복'과는 가장 먼 거리에 계셨던 분이었다. 어머니의 생애는 그토록 원하던 배움도 거저 얻어지는 작은 유산도 없이 매일매일 성실한 일상과 낙관으로 채워져 왔다.
조촐한 생일 파티를 마친 후, 휠체어에 앉아 오랫동안 눈을 맞추는 아내를 보고 뒤돌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버님을 보았다. 아버님은 요양원을 나서며
이번엔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하라는 대로 운동도 하고 혼자 밥도 먹게 해야지."
라며 다짐하듯 내게 말씀하셨다.
우린 다시 차를 타고 주민센터와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식당으로 갔다. 아버님은 콩나물국밥에 수육과 막걸리를 드시고, 나는 막 나온 비빔밥을 먹으려는 참에 핸드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떴다. 가방과 신분증을 두고 갔다며 주민센터에서 온 전화였다.
오늘 아침엔 집에서 급히 나오다 식탁다리에 부딪혀 새끼발가락에 금이 갔고, 오후엔 가방이 없는 줄도 모르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몇 주 사이에 우연히, 아주 낯설고 먼 곳에 떨어져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