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Feb 08. 2024

이야기를 품은 통영 바다의 빛

<바다를 읽어주는 화가 김재신> 북토크

며칠 전 작은 딸 주와 함께 통영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남해의 봄날'출판사에서 나온 <바다를 읽어주는 화가 김재신> 북토크가 있다는 문자를 받고서 이년 전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를 뚫고 남편과 통영 서점이 떠올랐, 김재신 작가의 전사회와 북토크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른이 된 딸과 함께 하는 여행은 여러모로 이 흐른 시간을 느끼게 했다.  여전히 어리게 보게 하는  자리 잡고 있다. 힘없이 젖을 빨던 얼굴, 볼이 통통하고 작은 앞니가 보이게 씩 웃던 표정, 야무진 말투. 그런 것이 기억의 항아리 속에 담겨 내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아있다.


통영으로 내려가던 길에 주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다. 작년에 면허를 따고 이제 겨우 열 시간 연수를 마쳤을 뿐인데 직접 고속도로를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 때 팽팽히 맞섰던 두려움과 설렘이 떠올랐다. 설렘에 힘을 실어주면 자신감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뜻 에게 전대를 내주었다. 천안휴게소에서 준비해 간 김밥과 딸기 도시락을 비우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꽉 채운 다음, 각자 앉았던 운전석과 조수석 자리를 바꾸었다.

는 호흡을 크게 하고서 깜빡이를 켜더니 금세 고속도로로 합류했다. 평일 낮이라 도로에 차량이 별로 없어서 속도를 내기에도 좋았고 차선바꾸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보 운전자는 바짝 긴장한 듯 보였지만 통영 근처까지 별 탈 없이 주행을 마쳤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다시 자리를 바꾸고 나서 우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뿌듯함은 주의 몫이고 감개무량은 나의 몫이었다.


북토크가 열리는 '미작 갤러리'는 통영 중앙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린 1층 안경원 앞에 차를 세우고 2층 갤러리로 올라갔다. 10분쯤 앉아있으니 꽤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었는데, 동그란 뿔테 안경을 끼고 팔짱을 낀 채 갤러리로 들어오는 관객들을 보는 이가 김재신 작가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끝없이 들어오는 관객들에  놀란 것 같았다. 통영이 아무리 관광객으로 붐비는 예슬도시라지만 전시오프닝을 겸한 북토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든 건, 통영이 이 화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지 보여주 고 있는 것 같았다. 북토크에서는 책 속의 문장을 낭독하기도 하고 작가의 친구들이 나와서 그와의 인연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래도 북토크의 백미는 역시 독자와의 Q&A시간.

'바다를 읽어주는 화가' 김재신(1961~)
사진출처 <갤러리 미작> 인스타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음악을 하는 젊은 남성의 질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지  생계를 위해 음악을 포기할 것인지 갈등 중이라고 말하며,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며 혹시 이런 고비가 없었는지 물었다. 김재신 작가는 그의 질문을 귀 기울여 듣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왜 고비가 없었겠습니까."라고 을 열었다. 자신도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 나서 15년간 붓을 꺾었노라고 했다. 미술학원을 차려 학생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해결하던 시절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애써 그것을 밀어기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마음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또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벽스러운 미를 탓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가는 자신이 잘하는 것은 그림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그림에만 매달렸는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팔려야 했고 그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최선을 다해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열두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 지 8년 만에 그는 신의 표현대로 '서울 시장을 뚫었다'. 

김재신 작가는 2013년 처음으로 서울 오픈 아트페어 'SOAF'에 참여해 출품작이 모두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고, 지금 그의 작품은 미국, 홍콩, 중국, 벨기에 등 국제 아트페어에서도 매우 주목받고 있다.

조탁(彫琢)기법으로 만든 <바다>

화가 김재신이 보여주는 통영의 바다와 산 그리고 땅은 붓이 아닌 칼끝에서 태어난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그림을 보면 화폭 가득히 펼쳐지며 넘실대는 다채로운 색의 주름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보석처럼 단단한 것을 쪼아 다듬는다'는 뜻을 가진  '조탁(彫琢)'기법은 작가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자 김재신의 예술세계 그 자체럼 보였다.

그가 조탁기법으로 작품을 는 과정은 이렇다.

통영의 바다나 동피랑 마을의 빛깔을 염두에 두고 목판 위에 아크릴 물감을 한 겹 씩 칠하고 말리며 삼사십 층의 색을 쌓아 올린다. 그렇게 완성된  캔버스 위에 조각칼을 대고 깊이를 조절하며 원하는 색상을 밖으로 드러내는 이다. 그는 기억과 우연에 기대어 화폭 위로 원하는 색상을 캐낸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는 약 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전시를 앞두고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 계속 덧칠만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옆에 있는 조각칼로 덧칠한 물감을 긁어냈는데 생각지 못한 빛깔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거기서 어렸을 때 아버지의 공방에서 가지고 놀았던 자개의 무늬를 보았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조탁 기법을 부단히 몸에 익히기 시작했고, 햇살이 부서지는 통영 바다의 윤슬이 고스란히 화폭으로 옮겨졌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는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듣는 사람을 좌절시키곤 한다. 그들의 끈기와 근성조차 타고난 재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북토크에서 나는 그의 '성공스토리'보다 지금도 계속되는 그의 출근길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객석의 한 관객이 손을 들고 아직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걸어서 작업실로 출근하는지 물었다. 

작년에 무릎 수술하고 나서는 걸어서 작업실까지 가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 새벽 첫차를 타고 가지요.


올해 육십사 세가 된 김재신 화백은 오래 서서 작업하려면 체력안배를 잘해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늘  북토크에서 남다른 예술혼을 지닌 화가가 아니라 자신의 업을 남김없이 살아내고 있는 한없이 성실한 직업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누구나 성공합니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은 후회와 상처로 얼룩져있다. 그래서 우린 거기서 얼른 눈을 떼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걸고 살아간다. 또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말에 자주 고개를 끄덕이고 다짐하곤 하지만, 사실 그건 자신의 실수와 후회로부터 멀리 도망치려는  마음이 아니었는지 묻게 된다. 


통영에서 나고 자랐으며 일평생 바다를 바라보며 그려왔지만 여전히 통영이 좋고 매일 다른 바다를 본다고 하는 사람. 그가 말하는 '지나간 시간의 소중함'이란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품고 출렁이는 바다처럼, 많은 후회와 실수를 지나 지금에 이른 자신을 는 그대로 품을 줄 아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당부처럼 들렸다.


엄마이자 아내이자 누군가의 며느리이고 자식인 나, 그동안 이렇게 살아오느라 ''가 될 수 없었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그런데 주와 함께 숙소로 들어와 통영의 밤바다를 보다가 조금 다른 생각의 길이 나기 시작했.

내세울 것 없어 보였던 그 모두가 제각기 다른 빛깔의 나였고, 그 모든 빛깔들이 켜켜이 쌓여가며 계속 내가 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통영 증앙시장
해물 파티 통영 다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