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하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길은 기억 밖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고난에 부딪힐 때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잠시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성형 후의 얼굴을 시뮬레이션한 후 수술을 결정하는 사람처럼, 혹은 서로에게 가장 잘 맞을 짝을 확률로 제시해 주는 결혼정보회사의 시스템을 구입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가장 최적화된 삶을 조언해 줄 수 있는 AI시스템이 있다면 우린 선택하고 후회하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작가 이안 쳉(1984~)의 작품 <BOB 이후의 삶>(2022)은 관객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이안 쳉은 심리학과 컴퓨터 아트를 전공한 미디어 아티스트로 <BOB 이후의 삶>을 통해 이미 AI와의 공존이 시작된 시대에 '일과 삶'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진지하게 묻고 있다.
<Life after BOB> 글래드스톤 갤러리 (2.14~4.13)
48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BOB이후의 삶>의 배경은 50년 후 지구, 인터넷이 세상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하듯이 모든 사람의 신경계가 '웨이비버스(wavyverse)'라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다. AI회사 ZIM은 사람들의 뇌에 탈부착이 가능한 인공신경장치 BOB(Bag of Belief)을 출시한다. BOB의 개발자 닥터 웡은 자신의 딸 '챨리스(Chalice)'가 태어나자마자 BOB을 이식시켜 매 순간 찰리스의 인생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완벽한 계란 프라이를 하는 법부터 오늘 어떤 과목을 공부해야 할지, 데이트는 몇 살쯤 해야 하는지 등등 챨리스의 인생에서 일어날 크고 작은 결정을 모두 대신해준다.
닥터 웡은 고민도 방황도 실수도 하지 않는 딸을 '마이 퍼펙트 걸'이라고 부르며 만족해하지만 챨리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우울해진다.
챨리스가 무기력하게 BOB의 지시를 따르는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레 두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예체능에 재능을 보였을 때 어떻게 진로를 설계해야 할지 여러 날을 두고 고민했었다. 예체능을 전공하게 되면 미래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대로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나조차도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왔는데, 자식들의 성공적인 인생을 미리 계획하고 그 목표를 향해 차곡차곡 실행하도록 만드는 건 불안과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성공 인생' 각본에 대한 선망은 있으나 그것이 아이들에게 최적의 인생일지 확신이 없었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만 하면 사는 내내 행복할지도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 시절 나는 마치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말했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두 아이 모두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서툰 부모였던 우리 부부의 염려와 조언이 자식들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BOB이 아니었을까 싶다. 챨리스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뇌에 BOB을 이식하고 살았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믿음 체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Bag of Belief'의 약자인 BOB은 말 그대로 '믿음의 보따리'다. 우리나라 부모들에게는 영어유치원과 선행학습을 통해 특목고와 SKY를 나온 후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의사, 법조인이 되는 코스가 성공한 인생이라는 단단한 '믿음의 체계'가 있다. 또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나이에 따라 이루어야 할 과업도 어느 사회보다 촘촘하게 정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사회적 BOB'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BOB'이 정해준 최적경로 인생각본을 살아온 챨리스는 스무 살에 최고의 삶에 도달하고 BOB을 종료시킨다. 챨리스는 BOB과 계약을 종료한 후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그녀는 BOB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인생각본을 사느라 버려진 '1000개의 인생(1000 lives)'에 눈을 돌린다.
'1000개의 인생'은 각자가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은유이다. BOB은 최단시간에 최고의 성과를 거두어 인생의 과업을 완성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선택해 주지만, 오로지 그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챨리스의 선택은 인간의 삶이 단지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벌어놓은 돈도 없이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일, 충분히 예상되는 불행이 나만은 피해 갈 거라고 무모하게 믿거나 알면서도 선택하는 일, 그냥 좋아서 하는 일, 결국 후회하면서 오랜 시간을 살아가게 될 일을 사람은 자주 선택하고 목격한다.
최적경로에서는 많이 빗겨 난 샛길에서 했던
수많은 삽질과 허튼짓으로 겨우 우린 여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아직 도달해야 할 '내'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 곧 내가 걸었어야 하는 길이라는 ''믿음의 보따리(BOB)'를 만나기 위해 오늘이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