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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06. 2022

갱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절 인연을 받아들이는 자세

 생의 마지막 날까지 우정이 지속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고 했네.

어떤 돌발 사건으로 우정이 더 이상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또는 당사자들이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네. 또 그가 주장 하기를, 때로는 역경에 의해, 때로는 점점 무거워지는 노년의 짐 때문에 사람의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네.

  (「우정에 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 도서출판 숲)


 몇 해 전 두 아이가 대학생이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심드렁했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에 환장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은 골반께가, 어느 날은 어깨가 아팠다가 말았고, 이만하면 행복한 것 같았다가 돌아서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나는구나'싶어지면서 감정이 이쪽저쪽으로 널뛰듯 했다. 맘 속엔 커다란 바위가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답답한데 막상 누군가에게 털어놓자면 뭘 얘기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볕은 따뜻했던 오후, 혼자 길을 걷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도 오래된 친구와 수다라도 떨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Y가 전화를 받자 난 그날 아침에 있었던 자식들과의 실랑이를 꺼냈다. 여전히 용돈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어른이 아니었고 더 이상 엄마의 잔소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이도 아닌 존재들. 스무 살이 넘은 자식과 부모가 함께 하는 일상에는 사춘기 때와는 또 다른 미묘하고 고유한 갈등이 있다.

 사실 그다지 큰 고민거리도 아니었고 그냥 아무 이야기라도 떠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내 말을 듣고서 대번에 말을 이어갔다.

네가 자식들한테 다 맞추면서 키워서 너희 애들 버릇이 없는 거야.
솔직히 엄마가 그렇게 키운 거지 뭐.
너 약간 네 멋대로 하려는 거 알지?

헐. 그래도 이십 년 넘게 가까이 지내온 사이인데 이렇게 선을 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얘도 갱년기가 되더니 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생긴 건지, 할 말 안 할 말 구분하는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모르겠지만 Y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고 결국 친구에게 수다 떨면서 위로받으려고 했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Y와 관계를 두고 고민했다.

늙으면 점점 더 외로워진다는데 이제 와서 이만한 일로 사람을 쳐낼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머리의 문제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서는 이미 Y를 떠나보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며칠 후 걸려온 전화를 받기도 하고 또 내가 걸기도 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달라져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관계는 이미 변해가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 2,30대까지만 해도 우정은 오로지 친구와 나 둘 사이의 일이었다. 우린 서로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세세히 알았고 때론 도우고 때론 오해를 풀며 공유하는 마음의 면적을 넓혀갔다.

그러다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과의 우정은 점차 빛이 바래갔다. 결혼 전에는 인간관계의 일 순위가 친구였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과 자식의 비중이 훨씬 커졌다. 점점 더 공유할 수 있는 관심사가 좁아졌고 헛바퀴도는 듯한 만남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힘겹게 이어 가느다란 우정의 끈마저 툭 끊어져 있었다.


Y와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육아 시절의 친구였다. 우리의 일상은 비슷했지만 내면에 있는 욕망의 지도는 좀 달랐었던 것 같다. Y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족들을 돌보는 것에 비해 자기를 성취하는 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반면에 나는 육아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사람이었다. 그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Y를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관계를 맺어왔던 거였다.  허전함을 누르고 육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Y가 나를 배신했다기보다 내 오랜 착각에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이면이 드러난 것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Y에게 남편과 자식 흉을 보면서 우정을 유지해왔다고 착각했다면 Y는 간간히 남편과 자식 칭찬을 하면서 자신의 요새를 탄탄히 지켜나가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쪽이었다. 친구끼리 누군가의 흉을 보든 칭찬을 하든 사실 그건 아무래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흉을 본다고 나쁜 것만 있지 않고 칭찬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것만 있지 않다는 건 이만한 나이쯤이면 말하지 않아도 다 짐작하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 건 생각의 다름이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였다.


친구가 많아야 될 것 같은 조급함이 있었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사람처럼 누군가와 계속 관계 맺으면서 허전함을 채우려 애써왔다. 나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보다 관계에 대한 소유욕을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평가받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친절하려고 애썼고 예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인간관계를 30년 정도 하고 나서 돌아보니 그건 노력이라기보다는 집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집착의 끝은 허무일 뿐, 조금 외롭더라도 나와 맞는 사람하고 인연을 맺는 것이 더 나았다.

 어떤 일이든 지나치게 노력하면 독이 되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노력을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이다.



인간관계에도 분명히 유효기간이 있다. 연애도 우정도 심지어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절(時節)'이란, 말 그대로 '시간의 마디'이니 애초에 인연이란 끝을 가지고 시작하는 한때의 만남이다.

지금까지 내가 쉴 새 없이 변해왔듯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제자리에 고스란히 있지 않고 그래서 한때 맺었던 인연들도 서서히 모습을 바꾸어 가며 멀어져 가고 다가오는 건지도 모른다.

배신감이나 서운함에 허둥대는 시간까지도 인연의 한 조각이라고 생각하며 다 읽은 책장을 덮듯이 지나간 시절 인연들에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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