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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Oct 11. 2020

01.

젊어도 아프다



 민트 빛으로 반짝이는 지중해 해변. 여유롭게 태닝을 즐기고 있던 예슬은 볼때기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얼굴을 달구던 열은 분명히 유럽의 제주도, 세이셸 섬의 축복받은 햇살이었는데. 이상하다, 여기가 어디지. 

 고운 모래밭을 기대한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것은 모시 이불, 방구석으로 들이닥친 뙤약볕은 서울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부터 예슬은 꿈속에서 가장 바쁘게 그리고 멀리 날아다닌다. 

 부스스하게 거실에 나가보는데 식구들은 모두 출근한 지 오래다. 부엌으로 들어가 프랑크프루트에서 샀던 커피머신 버튼을 누른다.

 지이이잉. 

 로마의 한 작은 슈퍼마켓에서 몇 박스나 쟁여온 커피 캡슐이 향긋한 커피를 뽑아낸다. 캐러멜 향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담은 머그잔을 들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 전원을 켜니 크로아티아 여행 상품을 광고하는 홈쇼핑 방송이 한창이다. 재작년 이맘때쯤 당시 애인과 차를 빌려 해안을 따라 드라이빙 했던 크로아티아 여행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감상도 잠시, 다 마신 커피 잔을 들고 일어서는 순간 찌릿, 허리 통증이 느껴져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허리를 살살 달래며 일어나 보는데, 이번엔 눈물이 찔끔 난다.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하기 무섭게 참을 겨를이 없이 커다란 울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 아무도 없잖아.

 예슬은 눈물을 참지 않기로 한다. 

 으허어엉. 

 모든 게 서럽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면서 3개월 긴 병가를 썼다.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만큼 몸이 회복되자마자 상공으로, 일터인 비행기로 돌아갔다. 동양인 치고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예슬. 영어도 수준급이던 그녀는 일반 승객 비행기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시험 삼아 지원한 중동의 왕자를 모시는 전세기 승무원으로 단번에 발탁되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스탠바이 시간이 일반 승무원보다 훨씬 많기는 했다. 본인 일정을 계획하는 일은 휴가를 미리 받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게 전세기에서 일하는 단점이라면 단점. 하지만 상대적으로 업무 부담은 덜하면서, 일반 노선이 가지 않는 나라와 섬을 갈 기회가 많다. 동기들 중에 그런 예슬을 시샘하는 눈도 적지 않았다.      


 3개월 공백 뒤 받은 첫 비행은 미국 플로리다 주. 15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기에, 복직이 설레면서도 머리를 손질하는 예슬의 손끝에 부담이 내려앉았다. 서너 시간 짧은 비행이면 몸 풀 듯이 다녀올 텐데.

  왕자는 언제나처럼 몸에 익은 미소와 매너로 예슬을 반겨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오늘 절대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가요."     

 왕가 사람들은 보모는 물론 승무원을 시종 부리듯 거만하다는 것은 편견일 뿐, 사람 나름이다. 예슬이 모시는 왕자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말투도 고상하다. 긴 비행 동안 식사는 딱 한 번에 진한 민트차를 몇 번, 간단한 샤워를 하는 게 전부인 왕자는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승무원들을 부르는 법이 없다.     

 "예슬, 돌아오니까 그래도 좋지? 솔직히 이만한 직업 어디서 찾아."     

 예슬이 전세기에 배정받은 후부터 줄곧 함께 일한 모로코 출신 동료이자 선배인 마리엠. 마리엠은 어느새 비행 8년차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전세기에서 일하고 받는 월급은 모로코에 있는 온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도 부족하지 않다.     

 "응, 그거야 그렇지. 마리엠, 나 없는 동안 심심했지?"     

 무사히 착륙 후 호텔 방에 들어가 예슬은 쓰러지듯 13시간을 내리 잤다. 마리엠이 저녁을 먹자고 했었는데 미리 거절 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잠결에도 했다. 약속을 잡아놓고는 자느라 혹은 너무 피곤해 못 가는 경우가 허다한 게 승무원들이다.     

 ‘비행은 순탄했어도 역시 오랜만이라 무리가 갔나 보네.’     

 침대에 누운 채로 팔을 끝까지 뻗어 룸서비스 메뉴를 집어 훑어본다. 멕시코, 쿠바와 지리상 가까운 곳이라 확실히 메뉴들은 다른 미국 호텔과 다르다. 타코와 수프를 주문했다. 20여분 만에 벨이 울리고, 팁으로 5달러짜리 지폐를 직원에게 건넸다. 

 고소하고 진한 옥수수 크림수프로 속을 먼저 달랜다. 달달한 바비큐 소스를 입혀서 바삭하게 튀겨낸 도톰한 돼지고기와 상큼한 파인애플, 매콤한 멕시칸 살사를 넣은 타코를 한 입 베어 무니 피로가 스르르 녹는 기분.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워낸 그녀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11시. 아침이야, 밤이야? 창문 커튼을 열었더니 캄캄하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호텔 로비 바로 내려가 마가리타 한 잔을 주문했다. 그녀를 알아보고 옆 자리에 자리 잡은 남자는 영국에서 온 조종사 매튜다. 강한 영국 악센트를 숨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그다.     

 “예슬, 내일 마이애미 해변 가지 않을래?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유명한 해변은 가야지!" 

 “아 그러고 싶은데, 오랜만에 비행했더니 사실 좀 피곤해서. 우리 다음 이야기는 비행할 때 이어서 하도록 해. 먼저 올라갈게, 굿나잇!”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일어서는 예슬을 보며 매튜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이다. 모르는 척 예슬은 방으로 그대로 돌아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돌아가는 비행 편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태풍 영향권을 지나던 비행기가 심상치 않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매튜가 전원 앉으라는 지시를 내리려는 찰나, 쿠궁.

 커다란 기체 흔들림에 선반에 놓여있던 찻잔과 그릇이 우수수 떨어졌다. 동시에 차를 우리던 예슬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며 직감했다. 

 ‘비행, 끝이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온 병원은 오늘도 만원이다. 이렇게 몸 아픈 사람들이 많다니 새삼 착잡해진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휴대폰 위 손가락이 가는 대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가족 채팅방에 동생 지훈의 메시지가 뜬다.      

 ‘구내식당이 별로라 오늘 밖에서 사 먹었는데, 이게 만 이천 원.’     

 뒤이어 전송된 사진은 쟁반에 놓인 제육볶음 정식. 깔끔하지만 양이 터무니없이 적은 고기에 김치를 포함한 반찬 몇 가지와 멀건 된장국, 흰 밥이 전부다. 스물일곱에 첫 직장을 가진 동생은 예슬이 퇴사함과 동시에 입사했다. 집에 백수가 둘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했건만, 신사동에 위치한 지훈의 직장은 출근 시간만 한 시간, 밥값은 다른 지역의 두 배다.     

 ‘내가 해도 저거보단 낫겠다. 백수된 마당에 내가 가서 점심밥 팔아야하나?’     

 농 섞인 답장을 보내는데 물리치료사가 예슬의 이름을 부른다. 치료를 받으면서 저녁거리 뭐할까, 생각에 잠겼다. 

 요리는 예슬의 유일한 취미이면서 안식처 같은 세계다. 새로운 요리를 많이 접하는 만큼 이국적인 재료와 레시피로 요리를 해 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도시락이라.’      

 도시락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 요즘, 동생 도시락을 만들어볼까. 문득 스친 생각인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싶다. 지훈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고, 예슬 자신에게도 소소한 즐거움을 주리라.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슬은 뭐라도 해야될 것 같다. 작디 작은 것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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