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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Oct 29. 2020

12.

돼지고기 소보로를 품은 브로콜리 트리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는 한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구나, 몸 회복 꾸준히 잘하고 우리 송년회 때 봐^^ 내 베프, 사랑해~’


 12월 24일, 해외 살이 중에도 미주알고주알 전부 이야기하며 지내온 친구 진희의 문자다. 

진희는 대학 졸업하던 해에 임용고사를 봤으나 고베를 마신 뒤, 이듬해 공무원 시험으로 돌리고 두 번만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 4년 차다. 진득하게 앉아 공부하는 성격이 못 되는 예슬은 그런 진희가 항상 대단하다. 1년 선배인 공무원 오라버니와 2년째 만나고 있는 진희는 결혼을 몇 개월 앞두고 있어 결혼 준비와 집 마련, 대출 문제로 하루하루 바쁘다. 

 “이래서야 애를 키울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니까, 내 집 아니라 은행집이라더니. 결혼식도 ‘스몰웨딩’이니 뭐니 하는데 할 건 또 해야겠고.”

 우는 소리를 하는 진희. 

그러나 예슬이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점프하듯 가볍게 뛰어가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안정된 직업 아니던가. 많은 젊은이들이 원하는 모습 아니던가.  항상 응원해오던 베프지만, 그 친구마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혼자 남겨지는 기분.

          

  20대 대부분의 명절이나 기념일을 가족과 보낸 적이 없다.

타향살이란 다 그러려니 해왔기에 예슬 본인 생일에 비행 스케줄이 잡혀도 큰 불만 같은 것도 없었다. 가끔씩, 복잡스러운 가족모임과 명절 음식 같은 것, 떡국, 송편, 각종 전 부침의 기름 냄새가 그립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얼굴만 보면 인사도 전에 시작되는 할머니의 결혼 재촉 잔소리,  교통체증과 엄청난 양의 설거지가 명절의 끝임을 생각하면 차라리 해외에 있는 게 편했다. 

 장남이 아니지만 큰 아버지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사를 받아 모시는 예슬네는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 해도 제사상 차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하루 종일 하는 요리 노동은 사실 예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것은 지훈도 마찬가지, 지훈 대에 가서는 제사를 모실지 어떨지 확신이 없다고 둘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예슬아, 이브날 오프면 무조건 나오는 거다? 그 호텔 바 이브날 샴페인 무한 제공이래. 우리 동기들 되는 사람 다 모여보자, 올해는!”

 명절은 조용히 지나가도 크리스마스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많은 중동국가라서 무슬림 축제를 제외하고는 할로윈이나 성탄절은 그 분위기가 한 달 내내 만연했다. 예슬 자신이 크게 기념하는 날은 아니었건만, 반짝이는 빨강, 노랑 조명에 잔잔한 캐럴송을 들으면 사실 살금살금 설레곤 했다.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는 증거 같기도 해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하고 돌아오니 성탄절 분위기가 예슬이 어렸을 때만도 못한 것 같다. 길거리에 캐럴송도 줄었고 트리 장식도 자그마했다. 제일 친한 친구들인 고등학교 친구들 중 절반은 결혼했고, 둘은 연애 중이니 크리스마스를 이제 친구들과 보낼 수도 없다. 어차피 챙길 수 없는 휴일일 때는 조금 아쉬울 뿐이었으나, 기념할 수 있어도 함께 보낼 이가 떠오르지 않는 이런 날이라니, 어색하고 헛헛해지는 그녀였다.

 '차라리 일이 있는 게 핑계 삼아 덜 외롭겠어.'


  눈사람, 산타할아버지, 루돌프... 이왕 하는 거 아주 화려하게 만들어볼까?

요리책을 넘겨보며 크리스마스 도시락을 구상 중이다.  인터넷도 뒤져보지만 결국 예슬 자신의 스타일대로 가는 게 제일 좋겠다 싶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거 맞지만, 너무 작위적인 것은 또 별로다.

 단맛과 함께 고기를 연하게 하기 위해 키위를 갈아 간장, 다진 파와 마늘 그리고 약간의 설탕을 넣어 양념에 다진 돼지고기를 해두었다. 잡곡밥을 정성껏 짓고, 트리 모양을 만들어줄 브로콜리는 살짝 데친다. 빨강, 노랑 파프리카를 세모지게 작게 자르고 달걀도 하나 삶고 있다.

 팬에 볶은 돼지고기는 제일 아래 깔아준 다음, 밥을 고르게 펴서 도화지 삼는다. 잘게 자른 브로콜리로 트리 모양을 잡고 파프리카와 달걀로 트리 장식을 몇 개 얹어주었다. 프랑크 소시지 몇 개를 편 썰어 장식하듯 슬쩍 올려서 완성한 성탄절 에디션. 적당히 심플하고 적당히 테마스러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동생.’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도시락 감사. 다들 아까워서 어떻게 먹냐고 하더라.  와인 한 병 사 가지고 갈게, 다 같이 한 잔해! 우리 식구 완전체 크리스마스도 오랜만이니까.’

  여자 친구도 있는 녀석이 누나 생각해서 들어온다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하면서 찡해졌다. 표현하는 것에는 무척이나 서툰 집안이라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해본지가 오래. 우리 식구만큼 서로를 아끼는 집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 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다 놓을게.'

 '초콜릿 맛이다, 무조건!'

 

 연말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특히나 올해는 더 힘들었던 것 같아서 이렇게 나이 하나 더 먹는 게 억울한 생각마저 드는 그녀. 막연한 낙관은 좋지 않다고 한 것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 같다. 글쎄, 자그마한 낙관도 없다면 이 연말이 더 슬프지 않을까. 


 '봄날이 곧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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