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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Nov 04. 2020

스탭 밀에 관한 단상

당면에서 푸아그라까지

'오늘 뭐 먹지?'

직종과 국적을 막론하고 많은 이가 이토록 공감하는 질문이 또 있을까.


학교, 유치원 보낼 아이들 끼니를 챙겨야 하는 부모들부터,

대충 아침을 때우고 출근하느라 바쁜 직장인들이 기다리며 뭐 먹을지 고민하는 점심시간.

재택근무자나 프리랜서도 시간만 다르지 식사를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제 먹은 건 빼고, 너무 부대끼는 것도 별로, 가격대도 적당해야지. 너무 짜도 곤란하고.

'그저 한 끼'라고 하대하려 치면, 이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심정이 때로는 참으로 지배적이라 결국 본인을 하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만하면, 인류 일생을 최대 고민거리다.


온종일 식재료를 다듬고 지지고 볶는 레스토랑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레스토랑이다 보니 할 수 있는 요리가 무궁무진한데, 그래서 또 귀결되는 것이다.

'오늘 스탭 밀, 대체 뭐하지?'

이것은 레스토랑 수셰프의 끝없는 고민거리.

일반 회사원과 다른 점이라면 구내식당이 아닌 이상, 레스토랑 직원들은 본인이 먹을 메뉴를 고를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아 물론, 미슐렝 3 스타에서 일하는 친구를 보니 거의 뷔페식으로 스탭 밀을 차리더라. 그런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자)

하지만 경력 있는 셰프가 하는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오히려 나는 고민이 없다.

'오늘은 셰프가 어떤 요리를 해주려나? '

강도 높은 주방 일을 견디게 하는 잠깐 동안의 달콤한, 거의 유일하게 앉아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 스탭 밀을 네가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출근하자마자 헤드 셰프가 나에게 물었다.

"....? (진심이세요?를 담은 눈을 꿈뻑꿈뻑)"

당면 두 봉지를 건네주셨다. 

"이거 어떻게 요리하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그냥 집에서 해 먹는 것처럼. 부담은 노노."

그러고선 15인분 정도를 하라고 하셨다.

당면 요리라 하면 생각나는 건 잡채뿐. 창의력이 발휘가 안 된다, 바로 눈 앞에 닥치니 말이다.

당근, 양파, 오이, 버섯, 두부를 따로따로 볶아놓고 간장, 설탕, 참기름 듬뿍듬뿍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당면의 생명은 불지 않게 조리하기 아니던가.

한 번 데쳐서 식용유로 조물조물 발라놨지만, 스탭 밀을 먹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서비스를 위한 재료 손질을 하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불어 가는 당면 생각뿐이었다.

웍에서 만들어지는 잡채 맛이란?

15인분은 해본 역사가 없어서 마지막 볶는 작업은 수셰프의 손에 맡겼다.

이걸 한 번에 볶아버린 스킬을 보고 있자니 팔 힘부터 길러야겠다.


익숙한 잡채 맛은 나지 않았다.

중국식 볶음면과 비슷했는데, 아쉬워하는 나를 보고 맛있다고 다음 주에도 하라고 하셨다.

진심인지 그저 한 끼 노동을 덜기 위한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위로는 된다.


수제 피자, 햄&토마토 그리고 연어&치즈
돼지고기&깍지콩 볶음 쌀국수
두 번째 내가 도전한 돼지고기 찹 스테이크 프렙


잡채를 시도하고 난 그다음 주 저녁, 

당면을 서비스 메뉴에 넣는다고 하시면서 면을 불리고 데치는 것까지 맡으라고 하셨다.

또 면이 불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마지막 30분 서비스 타임 때는 확실히 첫 번째 것보다 불어있었으나 어찌어찌 디쉬가 나갔다.

레어로 구운 송아지 안심 한 조각과 제철 버섯에 싱그러운 허브로 마무리하니 당면이 파인 다이닝 요리로 변신했다. 


한 번의 스탭 밀의 시도가 서비스 메뉴로 고려되기도 하는 게 레스토랑이다.

실제로 많은 셰프들이 스탭 밀이 더 맛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백한다. 

서비스 후 남은 음식을 살짝 다르게 내거나, 유통기한이 다가오는 재료들로 어떻게 대충 해봤는데 직원들이 엄지를 치켜세운다던가.

(냉장고 파먹기 하다가 본인도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요리가 탄생해서 스스로를 칭찬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섬세한 파인 다이닝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어도,

푹 푹 퍼먹고 후루룩 후루룩 들이키다가 흘리는 음식이 하루에 한 번씩은 필요하다.

격식이 있어야 하는 공간에서 격식 차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허용의 숨구멍.

서비스가 끝난 뒤 연약한 와인잔을 치운 다음 벌컥벌컥 마시는 맥주 한 병이 씻어내는 땀.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 있는 그 고민은, 자질구레하지 않다.

노동의 연료이자 대가이면서 그 노동을 견디게 하는 하나의 정신적 낙이라면.


오늘 뭐 드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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