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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Dec 26. 2022

#12 눈동자로 대화하는 법

이탈리아 로마


 처음으로 로마를 걸었을 때의 흥분은 어디로 갔는지, 한 달에 두 어번 가다 보니 스케줄에 로마가 뜨면 싫지는 않지만 감흥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사치가 어디 있겠냐 마는, 뭐든지 가뭄에 콩 나듯 해야 감흥이 생기는 법이다.

 1박 하는 호텔이 공항 바로 옆인지라 볼 것도 즐길 것도 없다. 호텔에 있기는 또 아쉬운 로마. 로마 시내에 나가도 갔던 곳 또 가는 것이겠지만, 맛있는 젤라토라도 하나 더 먹으려면 나가볼까? 이탈리아에서는 젤라토 하나를 사도 ‘아벨라!(예쁘다!)’ 소리를 들으면서 한 스쿱은 더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정말 예쁘지 않아도 그렇다니까.

 새벽같이 일어났더니 비행 후 호텔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후 네 시가 안 되었지만 몸이 무겁다. 한 시간만 쉬었다 나갈까, 하다가 잠이 스르르 들어 버렸지. 눈 뜨니 여섯 시가 넘었다. 허기가 몰려와서 호텔에서 그냥 저녁을 먹어야 하나, 고민했으나 정말 무난한 메뉴와 무난한 맛이었던 호텔 레스토랑의 기억이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다 번진 메이크업을 뒤로한 채 기어이 셔틀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사실 로마 시내에도 아주 맛있는 식당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탈리아인들도 로마에서는 맛집을 찾아선 안 된다고 할 정도라니까. 이왕 시내로 가는 김에 열심히 검색은 했지만 결국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파스타를 먹고 나왔던 것 같다.

 배도 채우고 잠도 떨어져 기운을 차렸더니, 그제야 밤이 무르익은 로마가 조금 예뻐 보인다. 한 여름밤이라 해가 지니 걷기 좋은 기온이 맞춰졌다. 가본 길과 안 가본 길을 뒤섞으며 정해진 곳 없이 걷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파스타를 다 소화했다. 이럴 때 젤라토 하나를 사야 한다. 제일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맛은 디폴트고 거기에 그 집에서 잘 나가는 맛을 하나 더 고른다. 이 차갑고 달콤한 존재는 여름밤에 없어서는 안 돼, 중얼중얼 흥얼흥얼 거리며 또 걸었다. 다 먹은 젤라토 와플을 감싼 종이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을 찾다가 뒤를 돌았는데 내 눈보다 세 뼘은 더 높은 곳에서 마주친 눈동자. 흠칫 놀라는 키가 큰 그 남자는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제 갈길을 가는 듯했으나, 나와의 거리가 좀 있던지라 여전히 내 뒤에서 걸었다. 등 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꾸만 뒤 돌아보는 것은 괜한 의심을 하는 것 같으니 조금 천천히 걸었다. 오 분을 못 참고 주위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면서 아직도 그가 내 뒤에 있는지 살짝 봤다. 그런데 심장이 쿵, 소리가 들릴 만큼 깜짝 놀라게 그가 내 바로 뒤에 있더니 곧 옆에 서는 것이었다. 나는 어버버, 조금 무서우면서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hi’ 습관적인 인사를 했다. 사실 속으로는 주위에 날 도와줄 사람이 있나 도망칠 공간이 있나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Hi, I’m Andrian.”

 얼떨결에 이상하고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그저 집에 가는 길인데 내가 자기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앞에서 걸으려고 하던 중 내가 뒤돌아봤단다. 사실일까. 미심쩍은 눈으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무안한 얼굴로 그는 등을 보이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곧장 반대로 걸어갈까 싶었지만 주위는 상점이 즐비하고 거리엔 사람도 많았기에 큰 위기감은 없어 나는 더 천천히 걸었다. 긴 다리로 앞에서 걷던 그가 갑자기 휙, 돌아 나를 보았다. 나는 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가 다가왔다.

 “그러니까 우리 집 가는 길은 맞는데, 아까부터 너를 본 것도 사실이야.”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던지고 보는(?) 이탈리아 남자들이란 생각에 이내 조금 안심 아닌 안심을 했다. 어디 가냐고 묻길래 나는 생각나는 대로, 판테온 보러 간다고 했다.

 “이 길로 가면 판테온 안 나오는데?”

 하하, 이런.

 괜찮으면 자기가 길을 알려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로마의 밤, 낯선 이와 동행이 시작되었다.


 사실 여러 번 본 판테온으로 향하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우크라이나 어머니와 이탈리아 아버지 사이에서 난 혼혈로,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산책 겸 밖에 나왔다가 나를 봤다고. 그의 영어는 아주 짧고 느릿느릿했다. 그래서 대화는 실제 오가는 내용보다 두세 배 느리게 진행되었고, 문 닫힌 판테온 앞에 서서 그렇게 느린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맥주 한 잔만 하자고 제안을 했고 판테온 근처 그가 자주 간다는 바로 향했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가 어떻게 그를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그의 영어는 너무나 기초적인 단어의 나열일 뿐이었는데, 스몰톡이 아닌 작가 기질이 묻어나는 철학적인 그의 말들을 나는 거의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 찾기 어려울 만큼 다른 존재였건만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은 내가 당시 생각하던 것과 상통했다. 이를테면 나는 매 번 다른 도시에 가서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 뭔지 모를 헛헛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비행 권태기, 라고나 할까.

 “여행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디로 떠난다고 무조건 뭔가가 바뀌진 않아요. 사람이란 건 결국 내적 변화가 있어야 모든 것이 바뀌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변할 수 있는 여지는 여기서도 가능하지만 한 평짜리 방 한 칸에서도 가능하다는 거죠.”

 라는 요지의 말을 갑자기 한다던가 말이다. 또,

 “우리가 말하고 있는 언어는 서로 다르고 모국어도 아니지만 뜻이 통한다는 건 느껴져요. 나는 글을 쓰지만 이런 복잡한 감정을 글로 말로 담을 수 없어서 힘들고요.”

 라던가.

 이외에 여러 말들이 떠오르고 잡혔다가 이내 흩어졌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셔틀버스를 놓치고 말았으나, 70년대에 샀을  같은, 박물관에서 봐도 놀라지 않을 법한 노란 클래식 차를 가지고 호텔로 무사히 내려다 주었다. 차에 올라탈 때도 순간 내가 이대로 납치되면이라는 생각이 스친  사실인데 그것도 알았는지 오래된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여주더란다. 어딘지 아니까 걱정 말라며.


  달이  지나지 않았을     로마에서 그를 만났다. 오래된  유명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을 놓고 마주 앉아 어색함과 친근함 그 어디에 선가를 맴도는 대화가 오갔다. 사파이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눈동자는 에스프레소 같은 내 눈동자를 오래고 들여다본다. 그런 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거리의 문제, 언어의 문제 등 현실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글 속에 나의 어떤 부분이 신비롭게 남을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그를 기억하고 써내려 가는 오늘처럼. 내 환상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로마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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