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누나 Mar 24. 2023

#13 들어는 봤나 낙지카레

세이셸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작은 나라 세이셸.

두바이에서 비행시간이 네 시간 정도로 가까운 아름다운 섬들이 모인 곳이다. 그 말인즉슨 유럽에서도 매우 가깝다. 우리가 제주도 가듯 유럽인들이 가볍게 휴양하러 혹은 신혼여행으로 가는 세이셸행은 하여 유난히 알콩달콩 거의 한 몸인가 싶은 커플 승객이 많다.

 비행이 짧아서인지 크루들도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도 17시간이 안 되게 굉장히 짧았다. 이는 착륙한 순간부터의 시간이라 호텔 체크인까지 적어도 1시간에서 1시간 반, 이튿날 공항으로 가는 1시간도 포함이다. 해서 보통 물놀이를 하고 레스토랑에서 뷔페식을 즐기는 정도로 짧은 휴가 같은 시간으로 보내게 된다. 비록 스테이는 짧아도, 더 바쁘고 비행도 긴 아프리카 남단의 섬 모리셔스 비행을 하는 것보다 비슷한 해변을 즐길 수 있으면서 가깝고 비행도 여유로운 세이셸이 일하는 자로서는 편하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후 그러나, 비행이 절반 이상 지나면서 비행기 흔들림이 심상치 않다. 구름 속을 헤집고 헤치며 조종실에서 요리조리 바쁘게 운항하고 있자면, 기내에서는 승객들을 안심시키고 안전하게 앉아 있도록 조치를 취하느라 바빠진다. 안전벨트 신호가 떨어지면 왜 그렇게들 화장실을 더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지, 심리적인 영향일까 싶다. (내가 승객이 되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터뷸런스라고 하는 기체가 불안정한 구간을 지날 때 비행기가 흔들리는 현상은 자연스럽고도 매우 흔한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불안함을 야기하는 것인데, 깊은 속마음을 살짝 말하자면 아주 바쁜 비행 때 적당한 터뷸런스가 있으면 사실 반갑다. 캐빈(기내)을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복도 가득 승객들이 서 있을 때, 화장실 줄이 백화점 화장실 줄 만큼 길 때, 서있는 건지 앉아있는 건지 모를 만큼 걸터앉아(부딪힐 수 있다는 가능성 아래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자세로) 있는 사람들이 많을 때, 놀이방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멈추지를 않을 때 등. 그럴 때 안전벨트 등이 ‘띵, 띵’ 울리면 승무원은 재빨리 기내 방송을 통해 물리적 강요가 아닌 강요된 자발성으로 승객들을 자리에 앉힐 수 있다. 물론 일 순위는 모두의 안전을 위한 것이고, 덤으로 한결 조용한 일터가 만들어진다, 하하.


 그런 터뷸런스가 오래가면 일하는 사람도 힘든 건 당연하다. 착륙 전까지 정리를 완벽하게 해야 하니 흔들려도 감당할 만하면 승객은 못 일어나도 승무원은 움직인다. 그날 세이셸 비행이 그러했다. 착륙 전 거의 두 시간 내내 요동치는 비행기에 서비스는 중단했지만 울렁거림을 호소하는 승객, 울어재끼는 아이를 감당하면서 식사도 채 하지 못한 주린 배를 움켜잡고 랜딩 준비를 했다. 어찌어찌 무사 착륙을 했으나 비가 와서 축축하고 후덥 한 세이셸 공기를 맞자니 기운이 더 빠지는 것이다. (기상 악화로 인해 그렇게나 대기가 불안정했던 것)

 체크인을 하니 피로해져서 한 숨 자고 싶다. 그런데 바로 잠들면 분명 자정이 되어 깰 것이 뻔하다. 새벽에 다시 잠들지 못하면 뜬 눈으로 밤새고 더 피곤한 상태로 다음날 비행에 갈 수밖에 없는 악순환. 두어 시간만 버티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저녁은 어쩌지? 뷔페 시간까지는 또 조금 남았다.


 털썩,

화장대 앞에 앉아 룸서비스 메뉴를 보려고 선반 위에 놓인 몇 가지 책들을 훑었다. 그런데 책이 왜 이렇게 많지?

가장 두툼한 책은 다름 아닌 컬러 프린트의 요리책이 아니던가. 요리책이 호텔에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잠이 조금 깨서 자세를 고쳐 앉아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요리에 대한 지식과 배경이 전무했던 나에게 프랑스 기법으로 지역 재료를 쓴 레시피가 담긴 요리책은 너무나 재미난 것이었다. 인도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해서 쌀, 커리종류도 꽤나 된단다. 실제로 요리책에 실린 많은 레시피는 아주 생소한 것이 절반, 다소 익숙한 것이 절반이다.

 세상 모든 커리를 좋아하는 내가-커리를 만든 이에게 축복을-꽂힌 페이지는 낙지 커리였다. 생선 살을 넣은 건 봤어도 낙지를 넣은 커리라. 사진을 보니 국물이 좀 있는 쭈꾸미 삼겹살 ‘쭈삼‘ 느낌이 나는데 재료를 보면 강황(튜머릭) 가루, 커리 가루, 생강, 코코넛 우유 등 동남아시아 커리 같군. 세이셸 섬에 아주 흔한 재료가 바로 낙지와 코코넛이라고 적혀있다.

 꼬르르륵. 사진 속 커리가 식욕을 자극한다.

요리책을 위에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참치 타다키, 시저 샐러드, 대구구이, 립아이 스테이크… 뻔한 메뉴들만 있다가

뒷 장에 세이셸 스페셜, 낙지 커리! 운명인가.

곧장 호텔 전화기 번호판 아래 그려진 스테인리스일 것인 돔 형태의 뚜껑 모양이 그려진 룸서비스 버튼을 눌렀다.

“룸서비스되나요?”

배가 많이 고파졌는지 나도 모르게 참치 타다키를 추가해 낙지 커리를 주문한다.

멋지게 스타일링한 요리책 사진과 달리 랩에 덮여서, 방으로 오는 도중 서버의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을 커리 국물 자국이 남은 국그릇은 모양새가 조금 다르다. 그래도 약소한 팁을 건네준 다음 책을 다 덮어놓고 저녁상을 준비한다. 랩을 벗기니 커리 냄새가 확 풍겨온다.

함께 서빙된 밥은 갓 지은 밥은 아니지만 커리의 진득한 물기와 찰기가 스며들 공간을 내어주는 바스마티 라이스. 곁들이는 노란 반찬은 얇게 썬 무 피클인가. 생전 처음 먹어보지만 내게는 상당히 익숙한 튜머릭, 마살라 커리 향이라 또 전혀 생경하진 않다. 우리나라에서 값싸고 쉽게 구하는 돼지고기 앞다리를 넣은 강황 카레(여기선 카레라고 해야 와닿는다)처럼 바다 앞인 이 곳에서 낙지를 넣는 것은 창의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요리였으리라. 이방인이 접했을 때 비로소 재탄생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접한다면 재탄생은 차치하고 탄생조차 인지할 수 없지만.

 커리 하나로 진지할 일이냐, 내가 이 한 그릇 먹으며 철학을 논했을까. 식도락을 위해 비행하던 여인이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12 눈동자로 대화하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