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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03. 2024

구십 사일. 육아휴직 없는 임산부

단호박 샐러드와 블루베리 스무디

“언니는 항상 고급지게 먹네!”


sns에 올린 내 사진을 본 동생 하나가 보낸 메시지였다.

채소 과일 유제품 값이 많이도 올랐으니, 토마토 단호박 루꼴라 치즈에 블루베리까지

이렇게 한 상 차리려면 사 먹는 게 저렴할 판이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단호박은 시댁에 들렀을 때 한가득 얻어왔던 것을 쪄서 하나하나 냉동보관해 두었고,

오래 먹으려고 토마토는 4개쯤 마리네이드 해 두고 반 쪽씩 꺼낸다.

루꼴라는 마감세일 때를 기다렸다가 주문했고,

치즈는 두 개 묶음으로 산 우유에 레몬즙을 넣어 간단하게 내가 만든 버전이다.

블루베리는 생과일보다 비교적 저렴한 냉동 블루베리.

혼자 먹는 나의 식단 메뉴를 단가에 따져본다면 꽤 놀랄 만큼 값이 많이 안 나간다.


결혼으로 지방으로 이사 오고 나서 새로 일을 잠시 했지만, 곧이어 임신을 했다.

하여 나는 육아휴직 따위는 없는 무직의 임산부가 되었다.

맞벌이를 원하는 남편은 아니고, 그저 나 스스로 이십 대 내내 일을 해왔고 전업을 위해 프랑스도 다녀온 열정과 비용이 허무해진 것.

임신 초기에는 일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전향한 일에 경력이 거의 없고, 서울보다 일자리가 적은 곳에서 괜찮은 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배는 점점 불러왔다.


10개월 시간은 꽤 길어 보였는데 어느새 배 불뚝, 때때로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남편이 주는 돈으로 생활비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값을 따져가며 카페 가는 일도 자존심 상했다.

나는 장 볼 때 세일 기간 확인하고 쿠폰 사용 가능 여부, 일주일 정도 먹을 재료들을 미리 계산하는데,

술값을 내는데 인색하지 않은 남편 지갑 속 영수증을 보면 화가 마구 치밀어 오른다. 화가 난 직후에는 그런 내 모습에 더 속상하다.

육아수당이 오른다던지 하는 정책은 나와 무관하며, 육아휴직 중인 친구들이 부럽다. 복직할 곳이 있다는 것이 더 부럽다.


이런 생각들이 깔려있는 임신 생활은 절대 즐거울 수 없음을 문득 느꼈다.

몇 년간 다시없을 나만의 시간일 수도 있다.

지금의 경력단절이 영원히 끝은 아니라는 확신으로,

아이와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정된 비용 안에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사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의 실험적인 요리를 맛있게 먹는 신랑은 나를 응원한다.

나도 나를 응원할 줄 아는 법을 익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타자기를 두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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