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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29. 2024

칠십일. 같이 걸어요

냉이 주먹밥


봄이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 전 몸풀기라도 하듯 하루종일 추적추적 조용한 비가 내린 오늘.

며칠 전만 해도 바람이 아직 차갑더니, 오늘은 따뜻한 비였다.

이번주 내내 배가 묵직한 것이 가만히 앉아있는 자세가 아니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바위를 품고 다니는 느낌이다.


운동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비가 오니 산책로도 조용하다.

낮 시간 대에는 유치원에서 쪼르르 나온 아이들이 바깥 놀이를 하는 풍경과

종류도 다양한 강아지들, 가벼운 조깅하는 어르신 그리고 어김없이 유모차 산책 나온 엄마들도 많은데

오늘은 어딘가를 향하는 목적 있는 발걸음들 뿐이다.

나의 목적만 보이던 내가 걷던 길은 어느샌가, 내 앞뒤 그리고 옆을 지나는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모차 안에 빼꼼 나온 아이와 눈을 꼭 마주쳤고 손잡고 걸어가는 유치원 아이들의 뒷모습을 좇는 걸 즐겼다.

내 뱃속 아이가 남자아이임을 알게 된 후에는 초등학교 앞 편의점에서 앞다투어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남자아이들도,

교복이 아직 어색한 중학생 남자아이들도 예전처럼 아무 의미 없이 보지 않게 됐다.


조용한 산책로에서 이어폰을 잠시 빼고 빗소리와 함께 걸으며 집에 돌아왔고,

잠을 며칠 잘 못 잔 탓에 오후 세 시쯤 스르륵 꿀 같은 낮잠에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마트에는 이제 봄나물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쑥, 달래, 돌나물, 참나물 그리고 냉이까지 보기만 해도 향긋해서 절로 괜찮은 나물 한 팩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냉이, 바로 너다.


타지에 살 때 엄마 반찬 이외에 먹고 싶지만 구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의 나물 종류.

엄마는 그래서 햇볕에 잘 말린 나물을 비닐팩에 소분해서 보내주시곤 했는데,

살짝 데쳐서 조물조물 바로 무쳐 먹는 봄나물은 건나물에 비할 바 없는 봄내음을 뿜어낸다.

물에 여러 번 흔들어 씻어내도 흙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냉이는 손질하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지만,

뿌리에 붙은 흙도 냉이의 향과 섞여 그리 나쁘지 않다.

15초 정도 가볍게 데쳐내 찬물에 헹군 다음, 참기름과 소금 그리고 다진 마늘로 무쳐냈다.

갓 지은 밥에 간장과 섞어 먹기만 해도 맛있는데,

달디단 낮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한 몽롱한 상태를 이겨내기 위해 손을 좀 더 쓰기로 한다.


일본에서 사 온 절인 매실 우메보시 하나를 다져서 따뜻한 곡물밥, 무친 냉이와 함께 섞어주었다.

조물조물 주먹밥을 만들어 내보니,

소풍 가고 싶다.

비가 그치면 꽃놀이에 들고 가야 제격일 연한 분홍빛의 소담한 주먹밥에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

마땅한 반찬이 없어 만만한 달걀 토마토 볶음에 조금 남아있던 잠봉을 올려 곁들여 늦은 점심을 혼자 해결했다.


따뜻한 봄날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흐리고 고요한 비 오는 날도 그 자체로 마음이 고요해져서 좋다.

봄이 곧 오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저 아이들이 내 눈에 예쁘게 된 건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게 됨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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