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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21. 2024

칠십 육일. 외로움이 아니라 여유라 부르겠다

땅콩버터


 혼자 시간 보내기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자신 있는 것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결혼 후에는 그 마저 시험받는 것 같았으니,

내게 있어 ‘혼자 지내기’는 ‘집순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할 당시 쉬는 날에도 몸이 축나지 않는 한 온전히 집에 있던 날이 많지 않다.

전시회나 박물관, 서점에 가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이도저도 마땅치 않으면 물론, 카페 가거나.

원데이 클래스도 많이 다녔고, 식료품과 주방용품 구경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지금도 그러면 되지 않냐고.


(거의) 완전히 정착을 하고, 책임져야 할 아이가 뱃속에 있으며 생활비를 받아 쓰는 주부가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나는 과거 십 년 제대로 된 정착살이를 하지 않아서

‘여기도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항상 그 장소에(나라에, 지역에) 일정 부분의 ‘흥미로움’이 있었다.

‘일하러 왔으니까 이 정도의 외로움과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다 ‘는 마음도 있었고.


나의 온전한 선택으로 결혼하고 이사를 하고 나니, ‘이 정도의 외로움과 불편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다.

다른 여자가 그렇다면 안타깝게 생각한, 출근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나를 좀 더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은 남편에게 서운했다. 그것에 서운해하는 것조차도 스스로 속 좁게 느껴졌다.



오늘 퇴근을 일찍 하겠다던 남편이 갑자기 서울에 장례식장에 다녀와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자정 가까이나 되어야 들어올 예정,

오늘 저녁은 뭘 같이 해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루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날이 되었고, 오늘은 그러나,

이제는 외로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않으려고 한다.)

김은 빠져 버렸지만 저녁 준비할 에너지와 여유가 남게 되었으니,

‘그러면 오늘은 미루던 것 중 하나를 해 볼까?‘

땅콩버터를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있었는데 안 먹고 굴러다니던 땅콩 한 봉지를 오븐에 살짝 구워 기름을 뺀 다음 껍질을 벗겼다.

오전에 청소기를 괜히 돌렸다. 사방에 땅콩 껍질이 날리는 난리를 굳이 혼자 만들어낸다.

푸드 프로세서에 소금 약간에 천연 당분을 첨가해 줄 말린 대추야자를 넣어 버터 질감이 날 때까지 돌린다.

간단한 공정이나, 땅콩 껍질에 이어 물 없이 오로지 땅콩기름으로 만들다 보니 뻑뻑해서 꽤 오래 갈아야 하고 끝으로 설거지도 조금 귀찮다.

그래도 소독한 유리병에 고무 주걱으로 버터를 싹 긁어 담으니 깨 볶는 것 같은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세 살 배기 아들 키우느라 매일 전투 중인 워킹맘 내 절친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한 시간만 혼자 있고 싶다, 난.”

이라며 나의 심심함을 가장 부러워한다.


아니 나 안 심심하다니까.


놀아달라는 친구 아들 성화에 잠깐의 통화도 어려운 친구를 보니,

몇 개월 후엔 땅콩버터를 만들기는커녕 발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니까 말이야.

내일 아침엔 느긋하게 토스트 구워 땅콩버터를 발라 먹어야지.

남편은 지루해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도 한 편, 혼자 늦게까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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