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버섯
아빠가 직접 기르셨다며 바로 전날 따서 싱싱하기 그지없는 송화버섯을 한 아름 가지고 온 친구. 요리를 즐겨하다 보니 시판 음료수 같은 걸 선물로 사 오는 것보다 이런 원물이 나는 정말 좋다. 역시 나를 잘 아는 친구. 절반은 그때그때 먹기로 하고 절반은 말려서 오래 먹으려고 채반에 퍼뜨려 놓고 햇볕 좋은 곳에 두었다. 생으로 먹어도 향이 좋고, 기름에 살짝 볶아 먹으면 향은 두 배가 된다. 볶은 버섯을 토스트 위에 올리기도 하고, 된장찌개에도 넣고 파스타에도 듬뿍, 어디에 넣어도 잘 어울리는 버섯은 만능 감칠맛 담당이 따로 없다. 버섯기둥은 똑 부러뜨려 끝만 잘라낸 다음 육수를 내는데 쓰면 된다.
나는 만능이 아니면서도 어디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성향이 있다. 어떤 집단에 가도 튀고 싶지는 않지만 소외되고 싶지도 않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적인 모임에서도. 어느 정도 잘 듣고 적당한 리액션을 취하는 사회성은 있는 한편, 때때로 아니 대부분 나는 내 의견은 내세우지 않고 개인적인 취향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괜한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 내 본능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존재 같을 때가 많았고, 그것에 익숙해져 갔지만 내면에는 항상 욕심도 많고 흥도 많다.
이러한 성향은 외국에서 승무원 생활을 하는데 처음에는 어려웠고, 나중에는 편했다. 너무도 다양한, 내가 접해온 외향성을 뛰어넘는 사람들과 일할 때는 감당이 안 된다고 느껴 나는 여기 안 맞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조용하게 내 일만 해도 별로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서 편해졌다. 그러니까 팀에서 모두가 재기 발랄할 필요는 없기에 나도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을 마치고 혼자 호텔방에 들어가면 일기에 담아둔 속내를 펼쳐놓고 노래를 틀어놓고 신나게, 흥얼보다 조금 더 심취한 데시벨의 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즐겼고, 시차가 맞으면 친한 친구와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곤 했다. 집단 속에서는 잠자코 있던 내 안의 꼬마도 분출할 구멍이 있어야 했던 것.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결혼 후에는 남편과 살면서 어쨌거나 더 이상 혼자 지내지 않게 된 이후, 화장실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언젠가부터 멈췄다. 아쉽지만 그만해야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은 남편이 회식이 있어 늦는다고 했다. 참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씻었다. 뭐, 벼르다가 그리 한 것도 아니고 남편 있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혼자 있으니 노래를 켜 놨다가 샤워를 하게 되었고, 따라 부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나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참, 오감이 다 발달해서 웬만한 바깥소리는 다 듣는 시기의 아가가 내 노래를 다 들었겠다.
좀 더 자주 흥을 돋워도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