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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Apr 21. 2020

두 가지 입맛, 하나의 식탁

병아리콩 코코넛 우유 커리

강황가루 담뿍 한 스푼을 다진 마늘과 생강, 양파 그리고 잘 삶은 병아리콩과 한참 볶는다.

원래 레시피를 무시하고 내 취향대로 마살라를 꺼내다가 멈칫, 향이 세면 언니가 못 먹을까 봐 아주 소량만 넣는다.

향이 충분히 올라오고 병아리콩이 조금 더 으깨 질 때쯤 언니가 좋아하는 양송이버섯을 한 소쿠리 넣고 한 번 더 볶는다.

씹히는 식감과 가니쉬를 위해 콩과 버섯을 조금 덜어놓는다.

코코넛 우유와 채소 육수를 넣고 40분 약한 불로 은근하게 끓여 졸인다.

색감과 식감을 위한 붉은 파프리카를 나중에 넣고, 불을 끄기 직전에 푸른 잎채소를 넣어 마무리.





부산 출신인 룸메이트 언니는 한식이나 일식을 선호하고 채소를 찾아먹는 편도 아니며,

간도 나보다 두 배는 세게 먹는 입맛이다.

나는 일주일에 쌀밥을 두세 번 먹을까 말까 한데, 언니는 밥 없이는 안 되는 사람.

한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나와 달리 얼음 50구짜리를 매일 얼려서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언니.


그런데 한 달 넘게 한 식탁을 쓰다 보니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입맛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을 것들을 먹어본다.

해산물 요리에 익숙한 언니는 된장찌개에도 새우를 듬뿍 넣는다.

언니 덕에 채소보다 해물이 많은 해물파전, 한국에 있던 때보다 더 자주 먹었다.

물컹한 식감이 싫다며 안 먹던 무를 고등어조림에 했더니 언니가 밥을 뚝딱 해치웠고,

단팥빵을 먹어도 팥을 빼먹을 정도로 팥을 안 좋아하면서, 나의 소울푸드라고 엄마에게 받은 레시피대로 팥칼국수를 했더니 언니는 다 비워냈다.


이는 아주 표면적인 현상일 뿐, 

그 너머에는 서로의 취향을 고려해 식탁을 차리게 되는 무의식의 배려심이 깃든다.

"소금 좀 덜 친다고 했는데, 혹시 짜면 밥 좀 더 먹어."

라든지

"일부러 야채 더 넣었다, 너 좋아하니까."

라든지 말이다.

항상 밥 먹는 시간을 정해두는 건 아닌지라 저녁을 따로 먹게 되는 날이면 서로를 위한 음식을 남겨둔다.



언니는 병아리콩도, 코코넛 우유도, 마살라도 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

그런데 이런 커리는 처음이라며 숟가락을 내려놓기 전까지 맛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고기, 해산물 하나 없이도 이런 맛이 나는 게 신기하다며,

채식주의도 해 볼만 하겠다고 너스레까지 떤다.


가리는 음식은 거의 없는 나는 그러나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까다롭지 않은 듯 사실 깨나 까다로운 편.

그래서 누가 뭘 권하면 일단 경계한다. 

뭘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심스럽거나, 내 계획된 식사 일정을 깨뜨리는 게 불편하다.

그런데 나도 조금 변하고 있다.

나 또한 식성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언제 무엇을 권해도 스스럼없이 잘 맛봐주는 언니와 식탁을 공유하면서 느꼈다,

재료와 음식, 음식문화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남이 먹는 방식에 너무 배타적이었구나.

열려있는 듯 참 닫혀 있었다.


오늘은 간장에 조린 먹음직스러운 닭다리와 닭다리 크기만큼 많은 채소를 함께 만들어 놔둔 언니다.

싹싹 비워내고 설거지를 마무리하며 오늘 칩거도, 무사히 보내는 중이다.

입이 많은 식구를-그만큼 다른 식성을- 건사해야 하는 부모의 고충을 헤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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