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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Apr 30. 2020

시작이 반이 아닐지라도 다시 시작.

나는 내 인생의 작가


 “그 좋은 직업을 왜 그만뒀어요?”

 열 중에 아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괜찮은 월급에 관리비, 교통비, 세탁비 걱정 없이 널찍한 숙소까지 보장되는 복지를 왜 포기했느냐고. 오늘 런던 , 모레는 파리, 다음 주 시드니 갈 수 있는 직업이 몇이나 되겠냐고.

 빈틈없는 올림머리에 진한 립스틱, 우아한 걸음걸이. 반질반질 닦인 공항 바닥에 구두굽이 맞닿을 때 나는 또각 거림은 오묘한 짜릿함을 주곤 했다. (어느 공항을 막론하고 공항 바닥에서 그 소리가 가장 경쾌하다.) 그래, 그런 질문 이해한다. 대답하는데 이제 조금 지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항공 승무원으로 6년 가까이 일을 하다가, 내려왔다. 이십 대 청춘을 하늘에서 보낸 셈이다. 그 모든 혜택과 여유, 누릴 만큼 누렸기에 ‘그 좋은 직업’이라는 형용을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고된 점들을 상세히 나열하지도 않겠다.

 해보고 싶은 게 많은 꿈 많은 소녀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승무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가족을 포함, 주변의 그 냉담한 반응이란. 키가 크거나 늘씬하지도 않고,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고(아직도 어쩔 수 없는 승무원 하면 연상하는 이미지라니!) 그렇다고 외국어가 아주 능통한 것도 아니었다. 착실하게 공부해온 딸이, 임용고사를 봐서 선생님이 되리라 믿고 계셨던 부모님이 느끼셨을 약간의 충격도 모르지 않았다.

  내 길이 아닌가 싶게 줄줄이 이어진 불합의 나날들을 지나, 작은 항공사를 거쳐 결국 항공사 중 규모가 가장 큰 중동의 한 항공사로 이직했다. 처음 정식 크루로 일하던 날 느낀 흥분과 긴장, 지금도 또렷하다. 밥 한 끼 안 먹어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에어버스 380, 2층 비행기에 처음 탄 날은, 3만 8천 피트 상공에서 또 다른 나만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 가벼웠다. 후회 없이 돌아다녔다. 하루, 이틀의 짧은 일정의 스테이도 피로를 마다하고 참 열심히도 경험하고 기록했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이, 어렵게 입사했지만 삼십 대에 접어들고 일이 손에 익으면서-땅에 발을 디디는 시간보다 상공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장기적인 플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비행 동안의 미션은 승객의 안전과 편안함보다는(그렇다고 승무원들의 비상사태 대비 능력을 의심하시지는 마시라.) 만성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로 떨치기, 냄새만 맡아도 식욕이 떨어지는 똑같은 기내식 먹기, 장거리 비행 견디기 등등.

 단순한 매너리즘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육체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돌아다니면서 정신은 좁디좁은 세계에 갇힌 것 같은 기분. 물론 그럼에도, 큰 걱정 없이 뉴욕에서 립아이 스테이크를 자른다거나, 뉴질랜드의 한 와이너리에서 와인 두 어잔을 기울이는 것 또한 나의 일상이었기에 쉽사리 그 라이프 스타일을 놓지도 못했다. 편안함과 조급함의 기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속절없는 시간은 잘도 갔다.

  

 그러나 정작 사직서를 던지는 것보다, 나이 서른을 넘기고 업을 바꾸는 것, 바꾸려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더 어려울 줄이야. 회사에 몸 담그고 있을 때는 사실 잘 몰랐다. 어렵겠지 싶었지, ‘맨땅에 헤딩’이 이런 거구나, 갑갑했던 회사 생활과는 다른 ‘내던져짐’이었다.

 '셰프의 꿈'을 펼치겠다며 호기롭게 귀국했던 지난여름. 더운 나라에서 오래 지내온 나는 한국의 추운 겨울을 제일 걱정했다. 그러나 더 뼈가 시리던 것은 현실.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동안, 겨울잠에 들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깊은 방황을 겪었다. 엄마의 결혼 걱정을 차치하고서라도, 집 장만을 위한 부동산 시세, 임신, 승진 등이 대화 주제가 된 친구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혼자만의 페퍼 랜드를 찾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역시 기승전 공무원이 괜한 말이 아니야, 임용고사 이제라도 준비해볼까, 아니면 국내 항공사 지원이라도 해야 되나.


요리학교에서 눈물 흘려가며 배우는 칼질. 칼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다.



 “아직도 다시 시작할 열정이 있어?”

 아직 항공사에 있는 친구가 파리로 출국을 앞둔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솔직히, 이십 대 같지 않다. 뭐든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은 거의 밑바닥이고, 옳은 결정인가 하면 더욱 할 말이 없다.


  백수가 된 지 거진 일 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파리의 방 한구석 싸구려 와인을 곁에 두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내가 있다. 열심히 한다 해도 문 밖에 나서면 입 벙긋 못하는 불어 실력, 어설픈 칼질에 창의력이 통통 튀지도 않고 혀끝이 예민한 미식가도 아닌데, 나는 여기에 와 있다. 요리의 시작이자 끝이고 꽃이라는 파리에서 배운다고 만능열쇠가 아님을 알면서도 결국 다시 도전 중이다. 미슐렝 셰프가 되고 싶은 건지, 창업을 하고 싶은 건지, 시작점에 다리를 조금 후들거리며 서 있는 나는 고백하자면, 모르겠다. 아직 갈 길이 구만 리인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끌어안고, 나는 나의 삶에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별 거 없었지만 원했던 승무원을 했다고 연관 없는 분야 도전도 문제없다는 논리는 자기기만 이리라.

 단지, 나 스스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의 궤도를 그리고자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납득할 답은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소설가가 이야기를 쓸 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이 작가를 끌고 간단다. 나는, '나'가 이끄는 책을 쓰는 중이다. 앞으로 오래, 좋은 요리를 하고 더 나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문장은 내 손으로 꾹꾹 눌러쓸 수 있다.  그 길 위에 있을 다른 인물들, 모든 당신들과 만들어낼 이야기를 계속, 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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