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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y 08. 2020

최소한의 취향

칩거의 여왕 일기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주거지역의 아파트 4층. 여느 유럽 건물처럼 냉난방은 보장 못해도 탁 트인 베란다는 있다. 따사로운 봄날들을 베란다에서 맞이하고 보내는 심정이란, 옆집으로 배달되는 택배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내 것인데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일주일에 딱 한 번, 생필품을 사기 위해 나서는 장보는 길을 살짝 돌아서 개나리와 튤립, 벚꽃을 관찰하듯 감상한다. 이제는 그것도 끝물이지만 말이다. 엄마, 아빠가 꽃나무를 찍는 걸 보고 그리도 뭐라 했는데,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동영상까지 찍었다. 굳이 가족 채팅방에 공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갇혀있는 파리에도 봄은 오네요.”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여도 집에만 있으니 칩거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단순한 편이다. 애인도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 온전히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미니멀리즘 라이프’가 그저 트렌디한 라이프 스타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의도치 않은 미니멀 라이프 실천으로 하여금, 나는 한 사람이 사는데 실로 많은 게 필요치 않음에 놀란다. 세제, 샴푸, 로션 한 방울까지 물품을 아껴 쓰는 나의 능력치도 칭찬받을 만하다.

 프랑스 이동 제한령이 실시되던 날,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들어간 마트에서 나는 평소의 차분함을 잃었다. 혀를 끌끌 차며 넘겼던 사재기 뉴스 기사에 나온 사람이 나였던가. 자를 줄도 모르는 파인애플과 딱 두 봉지 남은 상추를 비롯해 거의 동난 신선 식품 코너에서 남아있는 것들을 집어넣고, 잘 먹지도 않던 인스턴트 라면과 햄도 샀다. 사지 못한 쌀을 구매하기 위해 아시아 마트에 가서 40분을 기다려 태국산 쌀을 샀다. 그리고 그 날 산 것들 중 절반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감자는 싹이 나기 시작했다. 더 갖는다는 게 결코 이익이 아니었다. 이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안다.               

흡사 감옥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는 최고봉 인물은 단연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아닐까. 집도 절도 없어도 담배와 싱글모트 위스키, 그리고 남자 친구는 포기하기 않는 그녀는 자기만의 것들을 지킬 줄 알기에 자존감도 끝판왕이다. 


 미소와 한 잔 해보고 싶은 요즘,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도 ‘개취’, 나만의 취향이 분명하게 보이는 시점이다. 쌀밥은 가끔 먹어도 빵이 떨어지면 불안하고, 김치는 없어도 치즈가 한 종류라도 냉장고에 없으면 안 되겠다. 누가 보면 한 병 혼자 다 마셨나 싶게 온몸이 ‘홍익인간’으로 변하는 알코올에 약한 나. ‘미소’처럼 센 언니 같은 위스키는 내 취향이 못 되나, 저녁에 기울이는 와인 한 잔에 다크 초콜릿 한 조각은 포기가 안 된다. 삼십 년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나라는 인간만이 갖게 된 무엇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하루하루.(다행히 나의 취향은 프랑스에 꼭 맞는다. 최소한의 필요로 문을 여는 가게는 약국과 슈퍼를 비롯해 치즈, 와인숍과 빵집이 포함된다는 사실.)


 차보다는 산미가 짙은 커피다. 커피 좋아하는 것을 나만의 취향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물 이외에 마시는 음료는 거의 커피뿐이다. 오래 해외생활을 한 터라, 이 부분에 대해 몰랐던 내 가족도 최근에 알고 놀란다. 탄산음료도 주스도 안 마시는 나, 특이한 건가. 어쨌거나,  이 시국에 원두를 따질쏘냐, 캡슐 커피 기계가 세 들어 사는 집에 있는 것이 몹시도 고마웠다. 하루에 캡슐 딱 하나씩 아껴 마시고 있는 와중에, 아, 같이 사는 언니가 맞지 않는 캡슐을 넣어 기계가 맛이 갔다. 어떻게 하고 있냐고? 못 쓰는 캡슐 하나하나 뜯어서 원두가루를 긁어모아 다시팩(그렇다, 국물내기용 거름종이)에 넣고 핸드드립으로 내려먹는다.           


 ‘미소’가 아무리 속이 단단해도 남자 친구가 필요했던 건, 그녀도 타인이 필요한 인간이기 때문일 거다. 취향이라는 게 결국은,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 다름이 나타나는 법이다. ‘통’하거나, 적어도 이해하고 이해해줄 누군가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눈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님도 없고, ‘봉쥬르’ 인사 한 마디 나눌 이웃도 하나 모른다,. 룸메이트 언니는 공부하느라 못 본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밤을 지새우는 반면 나는, 타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읽고 씀으로써 확인해야 하는 인간이다. 

하늘을(창밖을) 이렇게도 많이 본 날들이 있던가

  아, 나의 미니멀 라이프의 한계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집주인의 낡은 책 서너 권을 여러 번 본 뒤, 파리 여행 책을 교과서처럼 정독했다.(파리 여행을 파리 집 안에서!) 일기와 편지를 쓰는 것도 잠시, 현대인의 귀결지 휴대폰과 태블릿, 노트북을 양 옆에 끼고 소파에 안착. 

 소설과 잡지 읽기, 블로그 탐방, 한국 라디오와 팟캐스트 듣기, 영상 보며 드로잉 배우기, 색다른 레시피 공유 등, 아, 이것이 또 다른 미니멀리즘이 아닐까? 이마를 탁 친다. 하루 스크린 타임 기록을 보고 흠칫 놀라기는 하지만, 디지털의 폐해나 복잡한 알고리즘 따위는 격리 해제 후에 생각할 일이다. 미니멀리즘이 아날로그와 동의어는 아니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겨우내 호러영화에 나올법하게 무서웠던 키 큰 나무가 오늘은 싱그러운 연둣빛으로 창 밖 너머 바람에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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