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야.”
아빠의 막내동생, 삼촌이 주인 없는 집에 먼저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안도감에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어……? 다행이다.”
나의 말에 엄마와 동생도 말을 거들었다.
“그러네.”
우리는 장례를 마치고, 아빠가 홀로 지내시던 집을 정리하러 경남 김해로 향했다.
장례식장으로 가던 그 길만큼이나, 두렵고 겁이 났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던 내 속내를, 아빠 집에 도착할 즈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빠의 공간이 좁고, 어둡고, 초라하면 어쩌지?”
아빠를 향한 걱정 같았지만, 실은 그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살아갈 나를 향한 내 걱정이었던 거다.
살아생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아빠의 집.
그 길에서도 내내 내 생각만 했던 나는… 참, 못난 딸이 분명했다.
그런 내가 도착해 마주한 아빠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고 깔끔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미식가였던 아빠의 부엌엔 각종 식재료들이 냉장고와 찬장에 가득 차 있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얼리어답터였던 아빠답게, 내가 갖고 싶었던 노트북과 태블릿 PC도 있었다.
심지어, 포장도 뜯지 않은 대형 TV가 안방에 턱 하니 놓여 있었다.
20년 넘게 따로 살아온 남편의 비밀 공간을 처음 본 엄마.
김해로 향하는 그 시간은, 딸인 내 감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자-알 살았네! 원 없이 돈 쓰고 갔네, 그래도……”
남편에 대한 원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 억겁 같던 시간 속 말들을
엄마는 그렇게 한마디로 뱉어냈다.
형의 짐을 정리하면서도 형수 눈치를 슬쩍 보던 삼촌이 입을 열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뭐가 이쁘다고 그런 말을 해요, 형수!”
늘 “우리 형수님~ 형수님~” 하던 삼촌은, 처음으로 형을 향한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엄마의 그 말 한마디에 누구보다 삼촌은 고마웠고, 형을 대신해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내 설움에 울어댔던 나는, 침대 머리맡 벽을 보고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어? 이 사진……”
예전에 내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던,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인화해 벽에 붙여두고, 아빠는 그렇게 사위와 딸을 매일 보고 계셨던 거다.
그 옆에는 남동생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진 귀퉁이엔 아빠의 그리움이 글로 쓰여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젊은 시절, 아빠 품에 안긴 엄마의 사진도 있었다. 그 시절의 나의 부모의 모습이 그저 아름답다.
각각 따로 찍힌 사진들이었지만, 아빠의 머리맡에는 우리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말로 전하지 못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아빠는 그렇게 사진으로 채워두셨나 보다.
짐 정리가 거의 끝날 무렵, 마지막으로 책상을 정리하다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뜯겨진 택배 송장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처음엔 뭔가 싶었다. 새 택배 용지도 아닌, 너덜너덜한 종이들.
보낸 사람란을 보니,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뭐 이런 걸 다 모아놨어……”
그랬다.
아빠 생각이 날 때마다 이따금 보냈던 택배.
그 송장을 하나하나 뜯어, 보낸 사람·받는 사람란에 적힌 딸내미의 글씨를 그렇게 모아두신 것이다.
아, 정말……
그게 뭐라고.
아빠는……
아빠가 주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겼고, 때론 귀찮아했고, 미워한 적도 있었다.
사랑인 걸 알면서도 외면한 적도 있었고, 무시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함부로 굴면서도, 부모란 존재는 늘 곁에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믿음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힘들지 않게 살아가려고.”
험한 세상 속에서, 무조건 내 편일 그 존재를 놓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마흔이 넘은 딸은 아직도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
그런 나의 비빌 언덕이었던 아빠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할아버지 기일에 엄마 몰래 대구에서 아빠를 만났다.
제사가 끝난 뒤, 소주 몇 잔에 취한 아빠가 넋두리를 하신다.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좀 오지… 살아 계실 때 얼굴 보여주는 게 좋은 거다.
죽고 나서 챙기는 건, 그건 할아버지가 몰라.”
그때 그 말이…
참 사무친다.
"아빠, 그 말... 지금 나한테 하는 말 맞지?
나한테 한 거였지? “
또 후회하지 않게,
또 등신짓하지 않게,
엄마한테 잘할게.
나 지켜봐 줘. 잘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