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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 치 불효

by 룰루복키


퇴근 후,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식사하셨어요?"


"그래, 퇴근했나? 집이가?"


"네, 막 들어왔어요."


"어... 그래... 밥은?"


"이제 먹어야 줘. "


"어...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아빠와의 통화 내용은 늘 비슷했다. 밥 이야기와 '그래 그래'가 반복되는 통화였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아빠의 '그래, 그래' 뒤에는 딸에게 할 말이 있는듯했다.


"뭔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은...

잘 살고 있제? 그럼 됐지 뭐.

피곤할 텐데 얼른 쉬거라 “


찝찝한 통화를 마치고 씻으려던 찰나 "띠링" 문자음이 울렸다. “미안한데, 10만원만 보내줄 수 있겠나”


" 아니, 100만원도 아니고 10만원이 없어?? “


엄마는 강릉에서 12시간씩 식당 일을 하며, 나와 동생 학비를 감당했다. 엄마 말에 의하면, 혼자 대구에서 지냈던 아빠는 월급에서 천 원 한 장 엄마한테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 이야기가 나올 때면 반복되는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런 아빠가, 100만원도 아닌 10만원이 없어서 딸에게 조심히 부탁하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차마 전화 통화로 입이 떨어지지 않아, 문자를 보냈을 아빠의 부탁을 30대 딸은 차갑게 외면했다.

나는 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돈도 보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삼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빠의 빚에 대해 듣게 됐다. 아빠는 전기배관공사 팀을 만들어 전국을 다니며 일을 하셨는데 , 몇 해 전 작업 중 직원 한분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일로 아빠가 번 돈 대부분이 그 직원에게 들어갔고 그럼에도 돈이 더 필요했던 아빠는 결국 삼촌에게 돈을 빌렸다고 했다. 삼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빠가 내게 10만원을 부탁했던 그때였다.


"아빠가 많이 힘들었었다. 그 일 때문에.

니네 아빠가 동생한테 그런 말 할 사람이 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한테까지 말했을까 싶더라.

이 일은 니랑 내랑 둘만 알고 있자."


10만원... 술 값에 척척 쓰는 나였다.

화장품이며 구두며 옷이며 10만원이 뭐야?

친구 생일에 카톡 선물하기는 그렇게 보내면서...


아빠의 10만원 부탁은 그렇게도 차갑게 외면했던 거다. 그때의 나는, 아빠를 얼마나 아프게 했던 걸까.


최후의 방법으로 딸에게 내민 손이었을 것이다.

용기 내어 건넨 말에, 나는 아빠의 손을 뿌리쳤었다. 나쁜 년...






최근, 남편 사업이 힘든 시기가 있었다.

사업 운영비와 직원들 월급, 각종 세금까지 쪼들릴 때로 쪼들린 우린 은행권 대출로도 모자라 가족들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두 살 아래인 도련님에게 부탁해 보겠다며 전화하러 나간 남편이 한참만에 집에 들어왔다.


"도련님 뭐래? 빌려줄 수 있데?"


대답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벼대는 남편에게 짙은 담배 냄새가 진동한다.


"전화... 못 했어."


"오빠, 내가 범이한테 (남동생) 부탁해 볼게"


'걱정 마 내가 해결해 볼게 ' 뉘앙스로 말은 뱉었지만 말과 달리, 나 또한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동생에게 돈 부탁하는 누나여서 부끄럽고 미안했다.

돈에 쪼들리는 내 상황이 싫고 짜증 났다.

이런 상황에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아빠가 떠올랐다.


그때 아빠는 어땠을까.

딸에게 10만원을 부탁하려고 통화 버튼을 누르던 순간, 얼마나 망설였을까.

정말 입이 안 떨어졌겠다. 우리 아빠.


아빠, 미안해.

외면해서 정말 미안해...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다시 한번 돈을 부탁하는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넘어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랐다.


"아빠! 식사하셨어요?"


"어, 그래.

박서방은 잘 있제?"


"네~ 아빠는 어디 아픈데 없어요?"


"나야 건강하지.

딸, 1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겠나?"


"뭔 일 있어요?"


"아니, 자재비 줘야 하는데 지금 하는 공사비가 다음 달에 들어와서. 조금 모자라네. 다음 달에 바로 보내줄게"


"아빠 쓰는 그 계좌로 보낼게요"


"고맙다 딸"


힘 있는 아빠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감 있는 아빠 목소리에서 '우리 아빠 잘 살고 계시는구나'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게 연락해 준 아빠에게 고마웠다. 그날 퇴근한 남편에게 아빠와의 통화내용을 전했고, 남편의 말에 참 고마웠다.


"여보, 100만원에 200만원 용돈 더 해서 보내드려.

장인어른 회 좋아하시잖아. 최고급으로 사드시라 그래. 그리고 그 돈은 우리가 드리는 용돈이야. 돌려받지 마"


아빠 계좌로 300만 원을 이체했다.

그럼에도 그때의 10만원의 빚은 덜어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돈이고?"

이체 문자를 확인한 아빠가 전화가 왔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신나 하는 아빠의 목소리에 내 어깨가 으쓱했다.


"박서방이 아빠 최고급으로 회 사드시라고 용돈 드리는 거래요!"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아빠의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그렇게 좋아요?"


"그래, 좋지! 딸이랑 사위가 내가 좋아하는 회 사 먹으라고 용돈 주는데! 안 먹어도 벌써 배부르다!

고맙다. 진짜 고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오늘은 내가 낼께" 친구들 앞에서 카드를 꺼낼 때면 마음 한편이 무겁다. " 아빠한테 10만원도 안 보내준 나쁜 년... "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 평생, 내가 살아가는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100억 천억보다 더 큰, 10만원의 빚이 내 가슴속에 맺혀 있다. 내가 돈에 쪼들려, 동생에게 손을 내밀어보니 그제야 아빠의 그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려졌다.

그제야...






중학생 시절, 강릉으로 이사 간 뒤 아빠는 택시 일을 시작하셨다. 아침잠이 많은 딸이 지각할까 봐, 8시만 되면 집 앞에 택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뚱한 사춘기 딸에게 아빠가 자주 해주던 말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고여있는 빗물을 지나는 차에 옷이 젖었어. 물 튀긴 차는 이미 지나갔고, 물을 맞은 나만 남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노?


내 혼자 화 내봤자 소용이 없겠지.

그 화는 나만 듣는 거고, 나만 속상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노?


얼른, 집에 가서 옷 갈아입거나, 닦아야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알겠제! “


그땐 몰랐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빠의 말이 답답하게만 들렸다.

"길 가다 빗물에 옷이 젖으면 짜증 나는 게 당연하지. 아빠는 왜 화를 내지 말라는 거야!"


지금은 안다.

아빠가 해 준 그 말에 의미를.

인생을 살면서, 힘든 일이 생겨도 그 속에 머무르지 말고 해결 방법을 찾고 툭툭 털어버리라는 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딸이 덜 힘들기를.

그런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는 그렇게 내게 그 말을 수없이 빗물에 빗대어해 준 것이었다.


중년이 된 딸은, 여전히 아빠의 그 말처럼

빗물에 옷이 젖을 때면 툭툭 털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그때의 10만 원은 툭툭 털어지지 않는다.


10만원 치의 불효.

아니, 10만원의 불효는

영영 갚지 못하는 마음의 빚으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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