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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초록

2015.12 교토 정원여행 - 사이호지(고케데라)

정원 위에 초록 눈이 내려앉았다

by 빛샘

교토의 가볼만한 정원을 찾아보던 중, 사이호지(西芳寺, 고케데라(苔寺)라고도 부른다)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플리커에서 찾아보니 온통 이끼로 뒤덮인 정원이었다. 고요하고 푹신해 보이는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여긴 꼭 일정에 넣고 싶어서 이곳에 가는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알아보니 여기에 가려면 좀 특수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립수목원처럼 무조건 예약해야 하는데, 가면서 시주라고 쓰고 입장료라 읽는 3,000엔을 내야 한다. 예약은 전화나 인터넷 이런 거 말고 18세기st 왕복엽서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좀 많이 망설여졌다. 뭐 한 번 가는데 이렇게 절차가 복잡한지. 그래도 계속 그 푹신한 풍경이 아른거렸고, 사진을 검색해 보니 교토나 오사카나 오카야마에서 보려던 정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 오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외국인데, 이번 기회에 반드시 가보자고 생각했다.


예약은 가고자 하는 날짜로부터 60일 전부터 받는데, 1지망/2지망 날짜를 적어서 보내면 답신으로 언제 몇 시(오전 11시 또는 오후 1시로 랜덤하게 정해주는 듯)에 오라고 한다더라. 그러면 그 답신을 챙긴 다음 정해준 날짜에 시간 맞춰 가면 된다.

내가 가려는 날짜 1/2지망, 가는 인원, 연락받을 사람이 누군지와 연락처를 적어야 한다. 한글도 제대로 적응 못한 내 손으로는 일본어를 사람이 알아볼 수 있게 쓸 수 없었으므로, 워드에서 영어로 적고 그걸 일본어로 번역해서 또 적은 다음에 프린터로 뽑음.


이제 이걸 부치기 위해 왕복엽서를 사러 우체국에 갔는데... 왕복엽서를 안 판다. 21세기라 그런지 이제 엽서는 안 팔고, 국제반신권을 판다고 한다. 이 국제반신권이란 것이 우리나라 돈으로는 1,400원 조금 안되는데, 각 나라의 해외 우편요금 1회의 값어치를 한다고 한다.


추가로 한국에서는 더 이상 왕복엽서를 팔지 않아 국제반신권을 넣어 놨으니, 이걸 사용해서 회신을 달라고 쓴 다음에 부쳤다. 60일 전부터 예약이 가능했지만, 나는 이 무지막지한 복잡함과 불편함으로 인해 매우 귀찮음을 타서 4주 전에야 보냈다. 국제우편의 악명 높은 전달 속도를 생각해 보니 일반우편으로 보내면 일본 가기 전까지 도착 못할까봐 EMS(...)로 부침. 13,000원 좀 넘게 깨졌다. 국제반신권은 혹시나 해서 두 장 넣었다.



사이호지 주소

Saihoji Temple
56 Jingatani-cho, Matsuo,
Nishikyo-ku, Kyoto-city, Kyoto
Japan
615-8286
+81 75 391 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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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3주 뒤에 답장을 받음. 내 주소를 약간 틀리게 썼는데, 다행히 편지 자체는 제대로 왔다. 또 다행히 애매한 오전 시간이 아니라 오후였다. 도장 복붙으로 추정되는 일본어 메시지 아래에는 손글씨로 영어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국제반신권 두 장 중 남은 한 장을 도로 넣어주더라.


기껏 회신을 받아도 저 편지를 안 들고 가면 말짱 도루묵이라 반드시 챙겨야 한다.

3주 걸려 받았으니 여권만큼 소중히...




료안지에서 나와서 59번과 11번을 갈아타면서 사가아라시야마역 근처까지 갔다. 료안지나 아라시야마 같은 교토 서쪽 근처에서는 버스 시간표가 제대로 안 지켜지는 것 같다... 어쨌든 사가아라시야마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는 28번 버스를 타고 사이호지 근처까지 갔다. 지나가면서 본 아라시야마 근처는 마치 인사동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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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번 버스를 타고 내려서, 구글맵님의 안내에 따라 골목 사이사이로 계속 걸었다. 한 20분 정도는 걸은 것 같다. 12월인데 더웠다.


늦으면 안 되니 조금 서둘러서 왔더니 너무 서두른 탓에 40분 전에야 왔다. 대부분 일본인 또는 중국인에 서양인은 1명 정도 있고, 한국인은 나 말고 아예 없던 듯.

입구에는 한글 안내가 같이 걸려 있었다. 검색 결과에는 딱히 잡히는 건 없던데 친절하다.



한 25분 전쯤부터 줄이 생기기 시작하고, 택시가 몇 대 오가며 사람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20분 전쯤 되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서 초대장을 확인한다. 한국에서 받은 그 회신 내용을 보여주고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초대장을 보여주며 3,000엔을 내면 무슨 나무 막대기랑 영어 가이드랑 반야심경과 정체불명의 또 다른 불교 경전을 줌. a4 3장 정도 분량이다.


사원 바깥부터 전파가 안 잡힌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길래 아 이제 운명의 반야심경 받아쓰기 시작인가... 하며 긴장하며 들어갔다. 안에는 무슨 과거시험st로 책상과 필묵, 화선지가 잘 정렬된 채 놓여 있었다. 주지스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오셔서 반야심경을 외우신다. 치온인에서의 그 정화되는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장엄한 불경 외는 소리가 끝난 뒤, 아 이제 시작인가 하며 붓을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무 막대기에 소원을 적고 그 뒷면에 주소를 적으란다.


?!?!?!?!?!?!?!?


뭐 적으라니 적었다. 적고 나니 그냥 앞에 내고 나가랜다.

굳이 반야심경 받아쓰기는 안 해도 되는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빨리 소원을 적고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대세를 따르기로 하고 바로 나갔다. 이 과정까지 대략 15~20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사원 안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아쉽게도 이 부분 사진은 없다.





나가서 사원 반대편 정원 구역으로 이동했다. 정원 입구에서 이 정원에 대해 일본어로 설명을 해주시더니, 그냥 자유관람 st로 둘러보라고 하신 듯. 순간 창덕궁 후원처럼 타임어택인가 하고 긴장했다...


이곳에서도 A7R2에 sel2470z를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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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낮은 구역과 높은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낮은 구역에는 작은 호수 둘레를 빙 도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끼정원은 나무가 드문드문 있고 이끼들이 모든 땅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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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반드시 가이드분을 따라다니는 방식은 아니지만, 폭이 좁은데다 사람이 대략 100명은 있다 보니 신중히 찍기에는 조금 힘들었고 창덕궁 후원st 타임어택 느낌으로 찍었다. 나무가 드문드문하다고 했지만, 정원 둘레의 높은 나무들까지 생각하면 거의 작은 숲에 가까운지라 호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그늘로 덮여 있었다. 조금 덜 빽빽한 비자림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셔터스피드도 비자림만큼 확보하기 힘들었다.


이날은 햇빛도 강해서 노출차가 매우 극심했다. 좀 더 흐린 날 왔다면 더 푹신푹신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쏟아지는 햇살 아래 풍경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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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난다


정원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이끼들은 마치 눈처럼 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고, 호수는 흔한 물고기의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빛은 호수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정적을 깨는 것은 정원을 둘러보는 사람들과 빗자루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정원에 초록 눈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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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입구를 따라 걸을수록 나무들이 점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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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의 이끼는 25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냥 흔한 이끼에서부터 자세히 보면 나무 같은 느낌을 내는 이끼까지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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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걷다 찍다 하며 정원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다시 입구로 되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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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다시 온다는 보장도, 교토에 다시 온다고 해도 여길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어서 보이는 대로 열심히 담았다. 이렇게 나가면 다음에는 여기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12월에도 푸르른 곳이었는데, 눈이 쌓이거나 비가 오거나 흐리다면 그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교토역에서 바로 여기를 온다면 73번 버스를 타는 게 나아 보이더라. 종점에서 내리면 사이호지까지 걸어서 5분도 안 걸린다.




LumaFonto Fotografio

빛,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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