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그늘 안에서
12월의 첫날, 미리부터 그러기로 한 것처럼 첫눈이 내린다. 풀풀, 폴폴, 눈발이 열심히도 제 몸을 던지는 통에 바깥의 정경을 또렷이 헤아리기 어렵다. 2014년 12월 1일 오늘, 나는 마음의 감기에 걸려 며칠째 침대 위에 자석처럼 붙어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입술은 바싹 말라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잠옷 위로 동동 떠 있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프레임 밖으로 내밀기가 너무도 어렵고 몹시 새퉁맞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한참만에 겨우 몸을 일으켜본다.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어렵게 다가선 창 너머에는 사거리를 빠져나가는 차들의 매끄러운 춤사위가 있다. 형형색색으로 모양 틀에 맞춰 찍어 나온 차들 사이사이를 눈은 아무 말없이 촘촘히도 메운다. 기실 자동차와 눈이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놓여 있다. 이런 것을 공존(共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온전한 의미에서 ‘함께 있는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장면은 불협화음을 빚고 있다. 눈은 그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리며 저들끼리 속닥이고 있지마는 수십, 수백 대의 저 차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저 안의 사람들은 여기 이 눈송이들처럼 사선으로 직선으로 방사선으로 요렇게 그렇게 이렇게 엉키고 겹쳤다가 떨어지고 풀어지길 원치 않는 것이다. 참으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다부지게 나아가는 바퀴 달린 자아(自我)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은 굵은소금처럼 이 눈송이들을 훅훅 던져 대고 있다.
다행히 이 첫 눈발은 지난 1년을 아무것도 풀어내지 못한 내 마음을 다시 귀한 소금밭처럼 만들어주려는 고마운 처방이 된다. 사 모으고 버리지 않은 채 묵혀 두기만 한 소비의 증빙들은 좀처럼 어울릴 수가 없는 그런 세상. 몰래몰래 견주어 보고 잣대로 내려치듯 그어버린 타인과 나의 경계선들. 지금 저 눈발은 그런 것들을 하얀 도화지에 그리고 오려서 날려버린 듯한 순백의 상표(商標)가 되어 이름난 회사들의 로고에 가 떨꺽떨꺽 붙어 버린다.
겨울의 정적, 그것도 한낮의 평화로운 휴식이 가능한 것도 이 고마운 첫눈 덕분이리라. 모든 인위(人爲)들을 무위(無爲)로 돌려놓는 엄격한 시계침처럼, 똑같이 자연 속으로 품어지기라도 한 듯한 이 고요의 행렬을 보라. 눈껍질에 덮이는 영광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소곳해진 저 귀한 수입차와 그 뒤로 똘똘하게 서 있는 국산 소형차의 엄위(嚴威)를 보라. 다 같은 신세이면서 서로 다른 값을 만들어내는 세상의 논리는 저 따뜻한 결정(結晶)들에 비하면 참으로 차갑다.
실제로 겨울의 눈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보내준다. 눈은 참으로 그것이 살갗에 닿을 때 느껴지는 온도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소중한 추억의 온기로 다가온다. 매서운 찬 바람에 몸을 담그고 생존을 위한 하루에 휩쓸려 다닐 때, 그 눈발의 기억과 쌓여 갈 추억 덕분에 용기를 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해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함께 기뻐하고 반가워하며 들떠 있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안녕하신가? 나를 기억하는 내 오랜 인연들도 모두 무강(無疆)하실까……?
지금 바깥을 다시 내다보니, 그 거센 눈발이 감쪽같이 그치고 이제는 깨끗이 맑게 갠 창공이 빛나고 있다. 나의 눈이 맑아진 것처럼, 이 온화한 하늘에 저절로 감사하게 되니, 오늘 12월의 첫날은 얼마나 복되고 남다른 것인지. 정말로 오랫동안을 쓰지 않은 글, 부치지 않은 편지, 가리고 쓰던 일기에 지칠 대로 지친 나의 영혼은 이 순간 소생하는 듯 가볍게 노래한다.
되돌아볼 과거가 있다는 것은 해를 거듭하는 일에 뒤따르는 책임 같은 것이라고 자못 무겁게만 여겼었으나, 이날만은 그런 굴레에서 조금 벗어나 봐도 좋을 것 같다. 마침 바깥공기가 실내로 난 작은 네 쪽의 창문을 통해 후욱하고 들어온다. 짜릿한 차가움이 내 맨손과 맨발을 훑고 그대로 이 실내의 정취 안으로 잠겨 들어간다. 얼마나 기다렸던 쾌감이었나. 이토록 시린, 겨울바람이라니! 실존을 의식하게 하는 이 매섭기 짝이 없는 도도한 바람결이 아프기보다 반갑다. 그만큼이나 너를 기다렸는가 보다. 엷은 웃음을 짓고 다시 침상에 앉는다.
한 발짝씩 용기 내어 딛는 발걸음들은 처음엔 모두 다 조심스럽다. 그러니 ‘두문불출(杜門不出)’을 뒤로 두고 앞장서 나가는 것이 떨린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독한 우울감도 함께 데리고 나서보면 더 좋을, 그런 기분이 든다. 설마 하고 뒤돌아본 창 밖은 어느새 눈발을 하나 둘 헤아릴 수도 없이 그저 뒤섞인 눈보라, 아니면 눈안개처럼 희뿌옇다. 달라진 연인의 얼굴 표정처럼 나를 당황하게 하는 저 눈안개는 생각보다 더 맹렬하고 강인한 것 같다.
이제 아까 세어보던 차들은 식별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눈보라뿐인 것처럼 세상이 가려지고야 말았다.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이 순간. 침묵과 무음(無音)으로 점철되어 가는 나의 존재감……. 그것이 단 하나의 진리일지도 몰라서 또 숨을 죽인다. 그러니까 나의 존재는 이 거대한 우주의 단 하나의 점(點)이거나 희귀석(稀貴石)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얼뜬 마음 말이다. 누군가는 나무랄까? 이런 궁금증이나 이토록 작은 마음을, 어떤 이웃은 헤아려줄까?
‘섬’이면서도 ‘섬’ 일 수 없는 인간 존재가 참으로 신비롭고 애틋하다. 꼭 필요한 시점에 내 손에 안긴 『반고흐, 영혼의 편지』도 누군가와 마음이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뒤의 순서에 책을 빌리고 싶어 할 무명(無名)의 인연을 위한 배려가 담긴 책. 그리고 진솔하게 살다 간 우리의 소중한 화가의 숨결을 더 잘 느끼게 도와주는 역자의 원의(原意)가 얼마나 감사한지. 비록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해 버린 그이지만, 평생 가난과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고 세상의 성공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작품은 얼마나 찬연하게 우리 앞에 있는지.
다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본다.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모든 눈발이, 그렇게나 맹위를 떨치던 순간의 열정들이 차게 식어 녹아버린 지형을 본다. 거기에 내가 있었고, 이제 여기에도 내가 온전히 남아있는 12월의 첫날, 나를 다시 살게 한 바로 그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