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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Jul 11. 2019

총천연색 미국식 단풍놀이

스모키 마운틴 Great Smoky Mountains  

“가을에는 스모키 마운틴에 꼭 가봐야지."

여행 일정을 짜는 데 이제 막 재미를 붙인 남편이 말했다. 7월에 미국에 도착해서 어영부영 여름을 보내고 9월이 다 됐다. 미국생활에 빠르게 적응되어 간다.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인 미국 마트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찾는 일도, 어디를 갈 때마다 세 식구가 3인 1조로 붙어 다니는 일도 익숙해졌다.      


지호는 아직 프리스쿨을 찾지 못해 집에서 붙어 지낸다. 남편 역시 대학에 강의를 들으러 갈 때 외에는 집에서 꼬박꼬박 밥을 먹는 ‘삼식이’ 남편으로 지낸다. 비싼 외식 물가, 느끼한 미국 음식, 한 대 뿐인 자동차, 아직은 낯선 지리 등을 이유로 나는 집에서 한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중간 어디쯤에서 ‘삼시세끼’ 찍는 듯한 일상이 빠르게 흘러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그러던 차에 스모키 마운틴으로 여행을 간다니 새로운 기대감이 일었다. 스모키 마운틴은 미국 동부의 뼈대로 불리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다. 테네시(Tennessee) 주와 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사이에 걸쳐 있다. 단풍을 즐길 수 있는 스모키 마운틴은 동부에서 보기 드문 전국구 국립공원이다.


9월말부터 전국에서 단풍을 보려고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모여들기 때문에 숙소가 일찌감치 동이 난다. 대다수의 관광객이 선호하는 숙소는 숲속에 운치 있게 머물 수 있는 통나무집 캐빈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어렵사리 작은 캐빈 하나를 잡았다. 비어 있는 날짜가 10월 말 뿐이다. 미국에서 보내는 최초의 가을, 첫 할로윈을 집 밖에서 보내게 되다니, 과연 어떤 여행이 될까.     


드디어 출발하는 날, 우리가 집에 없는 동안 할로윈을 기념하기 위해 집 앞 계단에 조그마한 호박을 한 덩이 놔뒀다. 고속도로를 달려. 여섯 시간 만에 노스캐롤라이나를 벗어나 테네시에 진입했다. 스모키 마운틴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피전포지에 있는 산장이다. 피전포지는 스모키 마운틴의 관광지 중 한 곳이다. 흘러간 팝송 공연장과 조악해 보이는 박물관이 쇠락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피스에 잠시 내려서 우리가 묵을 캐빈의 열쇠를 받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밖은 인공적인 불빛이 없이 깜깜하다. 중간에 길이 헷갈려 헤매는 동안에 곰이나 사슴을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숲속 한가운데 자리한 캐빈에 겨우 도착했다. 조금은 낡은 통나무집이다. 내부는 다소 퀴퀴했지만, 이불과 소파에 곰과 나무가 그려져있어 산장 느낌이 물씬 났다. 다른 호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벽난로와 오락기, 야외 자쿠지가 있어 독특하다. 지호는 새 숙소가 마음에 드는지 좁은 공간을 다니며 탐색했다.    

숙소의 진가는 다음 날 아침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총천연색의 단풍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아이를 데리고 야외 자쿠지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보글보글 몸을 담근 채 단풍을 바라봤다. 한 잎 한 잎 고운 색이 뚜렷하게 보인다. 바람이 불어 낙엽이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까지도. 자쿠지가 놓인 테라스의 나무틀이 마치 액자처럼 바깥풍경을 단정하게 담아 줬다.


아침을 챙기고 게틀린버그를 구경하러 나갔다. "와, 곰이다, 호박이다!"  설악산에 가면 설악동이 있듯이 게틀린버그도 스모키 마운틴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이다. 할로윈을 맞아 거리 곳곳에는 스모키 마운틴의 상징인 흑곰과 호박, 허수아비가 단풍과 어우러져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골목 안에는 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볼 법한 예쁜 가게들이 많다. 강아지의 목줄을 끌거나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온 관광객을 종종 마주쳤다. 곰이 그려진 옷 가게에서 지호가 그해 겨울 닳도록 신고 다닌 곰 부츠를 구했다. 지나가는 길에 지호는 기네스 박물관을 기웃거렸다. 미국에서 여행을 다니면서 보면, 관광지에 이런 ‘믿거나 말거나’ 류의 박물관이 꼭 하나씩 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도 많지만 특히 중년 이상의 백발노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들은 걷다가 힘들면 곳곳에 놓인 벤치나 흔들의자에 앉아서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봤다.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며 단풍을 배경으로 즐기는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아이를 데리고 비어있는 벤치에 앉아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선선한 가을 내음이 밀려왔다.


게틀린버그의 다양한 볼거리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문샤인 위스키 샵이다. ‘문샤인’이란 미국에서 증류주가 합법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달빛 아래 몰래 만들던 밀주를 뜻한다. 게틀린버그의 대표적인 문샤인 가게인 슈가랜드에 들어갔다.

5달러를 내고 두근두근, 처음 시음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바텐더를 에워싼 동그란 테이블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텐더는 초콜릿 맛, 피넛버터 맛, 과일 맛 등 달달한 맛의 다섯 가지 술을 차례로 설명하며 따라줬다. 내가 조그만 잔을 들어 원샷하자, 사람들은 첫 시음을 축하하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달콤한 향과 함께 40도가 넘는 독한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거리가 주홍빛 호박맛 문샤인 색깔로 물들고 있다. 게틀린버그에서만 하루 종일 신나게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간 것이다. 피곤해 하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오늘 어땠어? 응. 너무 너무 재미있었어. 가게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오늘이 무척 만족스러운 날이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어깨 위에 따스히 앉았다.


"오늘은 산으로 가볼까?"

다음날 우리는 본격적으로 단풍을 찾아 길을 나섰다. 날씨가 화창한 주말과 맞물려 전국에서 모인 차들의 번호판이 좁은 도로를 꽉 메웠다. 교통체증을 뚫고 멀리서 바라보던 전경 속으로 점차 들어갔다. 파란 하늘과 단풍의 보색 대비가 강렬하다. 개울가의 숲은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지호는 큰 나뭇잎을 양손에 쥐고 날개처럼 파닥거렸다.

스모키 마운틴은 뿌연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있어서 ‘스모키’라는 이름이 붙었다. 탁 트인 조망을 보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운이 좋았나 보다. 전망대에 오르니 동서남북으로 시야가 뻥 뚫렸다. 가까이에는 초록색 침엽수가 서있고, 멀리 노을에 물든 산맥은 붉고 푸르게 빛났다. 단풍의 안과 밖, 전경과 근경은 저마다 다른 색깔과 느낌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일몰이 시작됐다. 첩첩이 쌓인 산자락이 서로 다른 명암의 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사람들과 함께 서서 멋진 자연의 쇼를 감상했다. 스모키 마운틴의 장엄한 일몰만큼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멋진 광경이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보거나, 캠핑의자를 펴고 앉아서 보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림 같은 풍경을 완성했다. 그때 처음 배운 것 같다. 기다림도 여행이다.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지나며, 눈앞의 풍경이 다채롭게 바뀌기까지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1년 뒤 가을, 우리는 또 다시 스모키 마운틴을 찾았다. 이번에는 캠핑이다. 익숙해진 텐트를 이고지고 떠났다. 단풍이 한창 예쁘게 물들 때라 스모키 마운틴의 캠핑장에도 여행객이 많다. 주차를 하는 동안 옆 텐트 사이트에 있던 남자가 친절하게도 자리를 봐줬다. 힐끗 보니 작은 캠핑 트레일러 속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대식구인가 보다. 텐트를 펼치고 난 뒤,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마트에서 사온 소고기를 꺼내 구웠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한 스푼 올리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놓자 치지직~ 소리와 함께 연기가 일었다. 옆 캠핑카 식구들은 모닥불을 지펴 바베큐 파티 중이다. 바비큐 꼬치를 하나씩 들고 있는 통통한 아이들이 내가 굽는 스테이크 쪽으로 자꾸만 힐끔힐끔 시선을 돌린다. 어느 때보다 맛있는 스테이크가 구워졌다.      


저녁을 다 먹고 비가 그쳤다. 모닥불을 피웠다. 옆 자리에서도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아까 그 친절했던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지금 노스캐롤라이나에 살고 있어요."

"아, 한국이요? 우리 첫째 아들이 태권도를 배워서 잘 알죠."


켄터키에서 온 그는 육남매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다. 반가워서 한국 이야기와 함께 미국에 살며 여행 다닌 이야기를 한참 동안 떠들었다. 부족한 영어실력이지만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말이 술술 잘 나왔다. 긴 잠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타월로 돌돌 말고 있는 꼬마 아가씨가 캠핑 트레일러 밖으로 나왔다. 지호와 동갑인 막내딸 클로이다. 아저씨는 딸에게 지호 이야기를 하며 내일 함께 놀아보라고 했다. "아, 내일이 빨리 오면 좋겠다." 지호는 설레는 마음으로 꿈나라에 갔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지호는 클로이를 찾았다. 두 아이가 수줍게 만났다. 어색한 것도 잠시, 금세 친구가 되었다. 지호는 작은 백팩에 꾸역꾸역 싸갖고 온 장난감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 둘이 노는 동안 클로이의 언니 오빠들은 공을 차며 놀고 있다.


나는 아침을 차리려고 트레이더조에서 사온 냉동 LA갈비를 꺼내 구웠다. 클로이 엄마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또 어떤 요리를 하나요? 어제 구운 스테이크 냄새가 너무 좋아서 참기 힘들었어요." 그녀는 내가 대단한 셰프라며 칭찬을 해줬다. 미국 현지인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웃음이 났다.   

   

클로이와 지호

다 구운 LA갈비를 나눠주고 싶었지만, 클로이 가족은 곧바로 짐을 싸서 떠나야 했다. 커다란 픽업트럭에 짐을 촘촘히 쌓고 캠핑 트레일러를 접어서 연결했다. 엄마, 클로이 이제 가는 거야? 응, 켄터키로 돌아간대. 아이는 손바닥을 마구 흔들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짧은 만남이지만 헤어짐은 늘 아쉽다. 클로이 아빠는 켄터키에도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켄터키에 가면 왠지 그들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클로이 가족이 떠나니 캠핑장이 조용해졌다. 작년에 북적거리는 게틀린버그와 화려한 단풍을 돌아봤으니, 올해는 이렇게 캠핑장에서 한가롭게 단풍을 구경해도 될 것 같다. 키 큰 나무에서 낙엽들이 살랑살랑 내려온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한 별빛 같다. 바닥의 낙엽 더미에 쓸쩍 닿는 소리가 사각거린다. 가만히 앉아서 가을의 자연이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다.      

아이는 예쁜 단풍잎과 나뭇가지를 주웠다. 아무리 주워도 끝이 없는 자연의 놀잇감은 아이에게 늘 새로운 친구가 되어준다. 옆 캠핑카의 노부부는 일찌감치 야외 테이블에 나와서 목각인형을 조각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분주함이나 호들갑스러움은 전혀 없다. 단풍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노스캐롤라이나에 돌아오니 붉은 단풍나무가 며칠 새 앙상해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은 짧기만 하다. 내 인생에도 그런 찬란한 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다시 쌀쌀한 가을이 오면 스모키 마운틴의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단풍이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단풍을 즐기는 사람들의 느긋함이 함께 떠오를 것 같다.


어느 곳에서든지 단풍을 바라볼 수 있다면, 기억하자. 한 발짝 멀리, 때로는 가까이, 한 번쯤은 느리게 바라보기. 단풍을 바라보듯 사계절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이종림 소속 직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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