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스톤 Yellowstone National Park
"초록색 사막 같아."
사우스다코다에서 와이오밍을 가로질러 옐로스톤으로 가는 길.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윈도우 바탕화면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초록 땅과 파란 하늘.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예쁘게 떠올라 있지만, 왠지 생기가 없는 초록이다. 이렇게 지루한 녹색이라니...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움을 못견뎌 하던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떤 여행을 하게 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미국에 와서 우리처럼 1년여 간 연수를 하고 가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여행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다녀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면 저마다 대답은 똑같았다. 바로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다. 미국 1호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은 미국인들도 가기 쉽지 않은 곳이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유타나 콜로라도 주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겨울철에는 눈이 녹지 않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길이 반 이상 통제된다. 경기도만한 면적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야생 지역이나 다름없다.
그런 옐로스톤이 모든 이들이 꿈꾸는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땅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수를 보는 재미가 있다고 하고, 누군가는 흑곰을 꼭 보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만 들어서는 어떤 곳인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한 번은 가봐야겠다. 미국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에는 무조건 옐로스톤에 가기로 점찍어뒀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부터 자동차로 가기에는 힘이 들어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옐로스톤은 미국 북서부의 한적한 지역인 와이오밍, 몬태나, 아이다호 3개 주에 걸쳐 있는데, 우리는 콜로라도 덴버 공항에 도착해 와이오밍을 통해 들어간다. 이번에도 우리의 선택은 캠핑. 커다란 이민가방에 텐트와 코펠, 버너 등 각종 캠핑 장비를 담았다. 나머지 짐은 큰 트렁크 두 개에 꽉꽉 채웠다. 한여름에도 춥다는 지역에 가니 반팔부터 패딩까지 모든 계절의 옷을 다 챙겨 넣었다.
와이오밍 주로 진입한 첫 날,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설레는 마음처럼 산뜻한 바람이 불어 왔다. 앗, 고양이다! 아이가 휴게소 들판에서 뛰어다니다가 고양이를 발견했다. 누군가 까만 고양이에 목줄을 메고 산책 중이다. 고양이와의 여행이라니 정말 드문 광경이다. 고양이는 목줄을 매고 걷는 강아지 노릇(?)이 익숙한지 산책을 나름 즐기는 눈치다.
냥이를 길에 끌고 다니는 대범한 집사는 여행을 꽤 자주 다니는 미국인이다.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텍사스에서 알래스카까지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커다란 트럭에 캠핑 트레일러를 연결해 끌고 다닌다. 우리도 홀가분히 집을 떠나온 입장이지만, 때로는 다른 여행객들에게서 더 큰 자유를 배운다. 집에 두고 온 고양이들이 생각났다. 우리가 없는 사이 이웃에게 한 번씩 봐달라고 부탁하고 온 터다. 초코, 제시카야, 다음에는 우리도 같이 가보자. 냥이들을 태우고 미국을 횡단할 용기(?)를 그때 처음 얻었다.
옐로스톤에 들어가기 앞서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에 발을 들였다. 좁은 흙길을 따라 걷자 눈 덮인 산맥으로 둘러싸인 파란 잭슨 레이크가 나타났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서 그랜드티턴의 뾰족한 산봉우리 끝이 뭉툭하게 보인다. 호수에서 나와 도로를 달리니,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구름이 하늘을 가려서 초록 풀밭이 채도를 잃었다. 그 위로 듬성듬성 들꽃들이 피어있다. 추위 속에 피어있는 꽃이라선지 애잔하게 아름답다.
이윽고 옐로스톤 국립공원 표지판이 나타났다. 국립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우리가 타고 있는 SUV를 모기떼가 에워쌌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처럼 마구 달려드는 모기떼가 무섭기까지 했다. 양 손을 휘휘 저어가며 힘들게 인증 샷을 찍었다. 휴대폰은 일찌감치 안테나가 끊겼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옐로스톤이구나. 야생의 시작이다.
옐로스톤은 수십만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도 마그마가 땅 속 5km 깊이에서 흐른다. 땅 위에는 1만 여 개의 간헐천과 온천을 볼 수 있다. ‘옐로스톤’이란 이름도 온천수가 흘러 바위가 누렇게 변해서 붙여졌다. 옐로스톤의 크고 작은 간헐천은 저마다 이름이 있다. 누가 지었을까? 하나씩 이름 지은 그 정성이 대단하다.
옐로스톤에 들어와서 첫 번째로 본 간헐천은 블랙 풀. 간헐천 지역에 들어오니 흰 수증기가 바람을 타고 와 커다란 손짓으로 인사한다. 지구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우리를 따뜻하게 감쌌다. 쌀쌀한 날씨에 뻣뻣해진 얼굴이 스르르 녹았다. 조그만 간헐천들을 지나 주인공인 블랙 풀에 다다랐다. 가까이서 보니 물이 생각보다 맑고 깊다. 바위가 녹아 누르스름하게 변한 곳들 사이로 검푸른 심연이 느껴진다.
블랙 풀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슴 떼를 만났다. 아이는 신기한 듯 풀숲 너머 사슴을 바라봤다. 해가 저물어간다. 이틀간 밤을 보낼 국립공원 안의 캠핑장으로 향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옐로스톤처럼 노랗게 물들어간다. 수증기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실루엣이 마치 그림자 연극처럼 검게 그려졌다. 눈으로 느껴지는 온기를 뒤로 하고 차가워진 캠핑장에 도착했다.
옐로스톤에 오기 전에 숙소를 어디로 정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여러 숙소를 살펴보다가 공원 내 캠핑장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옐로스톤 안에서 머물며 돌아보기에 최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캠핑장이 전기도 물도 없이 오직 텐트를 펼칠 자리만 있다는 점이다. 전기를 못 쓰니 밤새 추위가 걱정이다. 우리가 오기 일주일 전 이곳에 눈이 내렸다. 6월 말이면 한 여름인데도 텐트 사이트 주변에 녹지 않은 눈 더미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같은 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수은주가 섭씨 30도를 채워가고 있는데 말이다.
캠핑장에 돌아오니 낮 동안 가볍게 입고 다닌 옷자락 사이로 추위가 파고들었다. 아이와 나는 두터운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날이 추워서 다행히 모기떼는 사라지고 없다. 날이 어둑하니 이마에 밴드형 미니 플래시를 붙이고 삼겹살을 구웠다. 스티로폼으로 만든 간이식 아이스박스도 사왔는데 크게 쓸모가 없는 것 같다. 아이스박스 안팎의 온도가 별반 차이가 없다.
이번 캠핑이 힘들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캠핑 장비를 마음껏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기를 못쓰는 데다가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에 평소 쓰는 캠핑의자와 테이블, 전기장판, 전기밥솥 등 포기한 아이템들이 많다. 캠핑은 무엇보다 장비가 중요한데, 슈트를 집에 두고 온 슈퍼히어로처럼 자신있게 전장(?)에 나설 용기가 사그라드는 듯했다. 전기밥솥이 없어 코펠로 밥을 안치고 뜸이 들기를 기다리며 김치찌개를 보글보글 끓였다.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는데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에 저녁상도 따스한 온기가 빠르게 식어갔다. 주위는 이미 깜깜하다. 옆 텐트에 들어온 이들은 벌써 이른 잠을 청하는 듯했다. 남편은 캠핑장에 들어올 때 산 땔깜을 꺼내 모닥불을 지폈다. 땔감 한 묶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그는 플래시를 들고 비어있는 텐트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나뭇가지라도 몇 개 주워 땔감에 보탰다.
빨간 불꽃에 손발을 쬐니 견딜 만한지 차가운 캔 맥주를 꺼냈다. 오늘 밤 얼어 죽더라도 이 맛에 캠핑하지. 아이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지며 마시멜로우를 맛있게 구워 먹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아이 손을 붙잡고 몇 걸음 내려왔다. 하늘을 바라보니 키 큰 나무 사이로 별이 쏟아져 내렸다. 지호야, 별 좀 봐. 별이 엄청 많다. 잠시 추위도 잊혀졌다.
캠프파이어를 끝내고 이제 텐트로 들어갈 시간이다. 텐트 안은 냉랭한 공기로 가득 차있다. 이고 지고 온 방한텐트를 텐트 안에 겹쳐서 펴긴 했지만 추위를 온전히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바닥에는 캠핑용 에어매트 뿐이다. 뜨끈한 전기장판이 그립다. 아이가 걱정이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긴 팔 내복 위에 폴라폴리스 점퍼를 입히고, 두터운 오리털 패딩을 입혔다. 다리에도 바지를 두 겹 껴입히고 양말을 신겼다. 나도 옷을 겹겹이 껴입어 중무장을 하고 오리털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밤새 어떻게 잠을 이뤘나 모르겠다. 그렇게 추운 밤이 또 있을까? 추위에 꽁꽁 어는 줄 알았다. 뒤척이고 또 뒤척였지만, 내 체온 외에는 온기를 느낄 만한 게 없었다. 침낭 안이 답답하다고 몇 번이고 침낭 밖으로 탈출한 아이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도 아침은 언제나 우리 편이다. 해는 떠오르고 야생의 환경에도 다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우리 이 추위에 살아남았네. 남편이 푸석한 얼굴로 모닥불을 지피며 말했다. 아이도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불을 쬐었다.
모닥불을 지피고 아침부터 캠핑장의 샤워장으로 온 가족이 출동했다. 국립공원은 환경 때문에 온수 사용을 제한하는 편이다. 하루에 한 번씩만 샤워장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준다. 샤워장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인 뒤 텐트로 돌아오니 살 것 같다. 아침이 되어 살만해진 건 모기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두터운 패딩을 뚫고 무섭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쫓아내며 밥을 겨우 먹고 밖으로 나섰다.
어제와 달리 화창한 하늘을 보니 오늘 부지런히 다녀볼 마음이 샘솟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길이 꽉 막혔다. 옐로스톤 안의 도로는 8자 모양으로 가는 길이 뻔하기 때문에 돌아갈 길도 없다. 눈부신 풍경이 저 멀리 보이는데 나아가지 못하니 답답했다. 무슨 일이지? 한참을 엉금엉금 가다가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교통체증의 범인은 바로 바이슨이었다.
덩치 큰 바이슨 떼가 길을 지나느라 차들이 멈춰 서서 기다려주고 있던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닌데 차들이 꽉 막혀서 갈 줄을 몰랐다. 앞으로 서서히 한 걸음씩 나가다 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좁은 차선을 느릿느릿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번은 오리 떼를 만나서 똑같은 교통체증을 겪은 적도 있다. 기다리던 시간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휴대폰을 꺼내 바삐 셔터를 눌렀다. 바이슨은 카메라 세례가 익숙한 듯 무심히 지나갔다. 우리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바이슨을 목격했다. 바이슨은 털이 덥수룩하고 굵은 뿔이 나 있다. 예전에 동물원에서 본 바이슨은 좁은 공간에 배설물을 가득 쌓은 채, 뒤엉킨 털을 덮어쓰고 귀신처럼 섬뜩하게 우리를 바라봤던 걸로 기억한다. 옐로스톤에서 만난 바이슨은 차들을 홍해처럼 가르며 누구보다 자유롭게 런웨이 쇼를 펼쳤다. 이게 바로 바이슨의 참 모습이었구나.
옐로스톤은 야생동물의 천국이다. 이번 옐로스톤 여행은 아이에게 야생동물을 보여주기 위한 천연 동물원으로서의 의미도 컸다. 낮에는 바이슨을 보고, 해질녘에는 사슴 떼를 봤다. 비지터 센터에 가보니 옐로스톤에는 늑대, 엘크, 바이슨, 코요테 등 수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며 야생동물을 볼 기회가 많았지만, 옐로스톤에서처럼 코앞에서 가까이 구경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야생동물이 자주 출몰하기에 주의 푯말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캠핑장에서 음식은 절대로 꺼내놓으면 안 된다. 야생동물이 와서 쓰레기를 헤집지 못하게 쓰레기통도 철문으로 여닫게 해 놨다. 혹여 바이슨이나 엘크가 나타나더라도 너무 가까이에서 셀카나 인증샷을 찍으면 위험하다는 주의도 자주 눈에 띈다. 사람들이 전설처럼 말하는 흑곰을 진짜 만난다면 반가워해야 할까, 도망쳐야 할까?
맘모스 핫스프링스에서는 잔디밭에서 한가로이 볕을 쬐는 엘크 떼를 봤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국립공원 직원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야생동물도 보호하고 사람들의 안전도 지키기 위해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직원 한 명이 아이들을 위해 엘크의 모피가죽과 발, 꼬리 등의 표본을 가져와 설명해줬다. 지호는 사슴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작거리며 간지러운 촉감에 키득키득 웃었다.
가장 예뻤던 간헐천인 모닝 글로리를 보러 가던 산길에서 곰의 흔적을 목격하기도 했다. 진흙 위에 독특한 발자국이 여럿 눈에 띄었다. 사람 발자국보다 크기가 약간 크고 동글동글 넓적하다. 바로 곰 발자국이다. 주변을 다시 보니 곰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인적이 드문 이 길에 곰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 지호는 곰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대보며 신기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산길을 올라 모닝글로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간헐천이었다. 가장 얕은 곳부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무지갯빛이 영롱하게 펼쳐졌다. 화려한 색상의 독버섯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치명적인 열기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수 가장자리에는 꽃들이 다정하게 피어 있다. 아이를 옆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프레임 안에 이름 모를 들꽃 옆, 꽃 한 송이가 더해졌다.
옐로스톤에는 간헐천만 있는 게 아니다. 지구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풍경들이 종종 나타난다. 지나가다 푸른 이끼로 융단이 깔아놓은 듯한 들판이 멋져서 차를 세워 내렸다. 칼바람이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저물어갔다. 옐로스톤 강을 지날 때 하늘은 어느 때보다 붉고, 강은 파랗게 가라앉았다. 자연 그대로의 일몰이 보여주는 극명한 대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위태롭게 길을 건너던 사슴도, 이름 모를 새들도, 때때로 솟구치는 뜨거운 물줄기도......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고요했다.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길었던 하루가 또 지났다. 오늘도 별이 많다. 빨간 불꽃이 춤추는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모닥불은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말없이 불꽃만 바라본 채 한참을 앉아있어도 괜찮다. 그거면 됐다. 자연의 한 가운데서 캠핑을 한다는 게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모닥불의 남은 불씨를 뒤로 하고 이제 다시 냉기가 가득한 텐트 속으로 들어갈 시간. 다시금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전날 추위를 한번 겪어봤기에 더욱 옷을 겹겹이 껴입고 중무장을 했다.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올 텐데 어디 박스 같은 게 없을까? 박스를 대신해서 비지터 센터에 버려진 안내 책자를 몇 권 주워왔다. 에어매트 바닥에 깔았다. 오늘밤은 조금 덜 추우면 좋겠다.
둘째 날 밤도 역시나 추웠지만 전날보다는 견딜 만했다. 그런대로 잠을 이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하루를 앞당겨 옐로스톤을 떠났다. 추운 데다가 비 예보까지 있어 더 이상 그곳에서 바티기는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틀 간 힘들게 캠핑하며 간헐천과 폭포, 야생동물 등 원하던 볼거리를 가득 봤으니 여한이 없다. 옐로스톤을 벗어나니 비로소 휴대폰이 터진다.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고 우리의 긴장도 이내 풀어졌다.
그날 밤 와이오밍 주 뒤보아의 한 캠핑장으로 갔다. 옐로스톤에서 추운 밤을 보내는 내내 뒤보아의 작지만 아늑한 캐빈이 생각났다. 뒤보아의 캠핑장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야생동물의 크고 작은 조형물을 보는 재미도 독특했다. 뒤보아의 캐빈은 테라스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통나무집이다. 비록 화장실이 딸려있지는 않지만, 침대가 있고, 매서운 바람을 충분히 막아주기에 충분한 튼튼한 통나무 벽이 있다. 전기와 물은 물론 실내 수영장까지 쓸 수 있는 사치스러운 공간이다.
옐로스톤에 있었다면 또 한 번 산짐승들과 함께 야생 버라이어티를 찍고 있을 시각에 60달러짜리 캐빈의 테라스에 앉아 여유롭게 밤 하늘을 바라봤다. 혹독한 고생을 겪고서야 진짜 아늑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때 이후 한여름에 가장 추웠던 옐로스톤에서 이틀 밤이나 견딘 우리의 경험은 무용담이 됐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가든 “옐로스톤에서도 잤는데 뭘”이라며 한 단계 진화된 전투력을 자랑했다.
미국에 와서 맞이한 첫 가을, 비 내리는 와중에 모기에 뜯겨가며 힘겹게 텐트를 치던 첫 캠핑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한번도 못해본 캠핑을 그렇게 미국에서 시작했다. 값비싼 장비나 지식 없이 참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옐로스톤에서 살아(?) 돌아오니 어느덧 ‘캠알못’ 8개월 차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캠핑을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행복감만큼 고생길도 동반되는 캠핑의 매력. 때로는 비를 맞고 추위에 떨면서도 마약(?)처럼 즐기게 됐다. 옐로스톤에서의 캠핑은 생생한 자연을 가까이에서 보고, 야생의 환경에서 먹고 자는 리얼 캠핑의 진수를 겪게 해준 경험이라 더욱 특별했다. 그렇게 때 아닌 혹한기 훈련은 성공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