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 데스밸리 Las Vegas, Death Valley
창밖에 커다란 네온사인이 나타났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비치는 환한 대낮인데도 라스베이거스를 대표하는 ‘라스베이거스 사인’은 한밤중에 전구를 켜 놓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찌뿌둥한 잿빛 풍경이 이어지다가 비로소 슬롯머신에 럭키세븐이 걸린 듯 쾌청한 날씨를 만났다. 캠핑카에서 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코발트색 하늘이다. “엄마, 이렇게 해 봐.” 나는 아이의 주문대로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는 우리만의 시그널을 나누며, 드디어 라스베이거스 입성!
두 번째로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고양이들과 함께 캠핑카로 미국을 횡단하는 중이었다. 냥이들은 덜컹거리는 캠핑카에 서서히 적응을 해갔다. 라스베이거스의 눈부신 풍경을 만나자 제시카는 커튼 너머 바라보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얼른 내려서 사진 한 장만 찍고 가자." 라스베이거스에 들어온 기념으로 인증 샷을 남기고 가기로 했다. 마침 지호는 예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재빨리 맨발에 슬리퍼만 끼우고 캠핑카 밖으로 나섰다.
지호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뜨거운 햇볕에 그곳에 모인 젊은 사람들의 열기가 더해져 후끈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벼운 옷차림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라스베이거스를 즐기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사인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옆으로 비껴 서서 빠르게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사실 라스베이거스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밤의 라스베이거스는 우리에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공항에서부터 카지노 머신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화려한 호텔과 쇼핑몰, 레스토랑과 카지노가 이어지며 호시탐탐 사람들의 지갑을 노렸다.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를 구경하러 가기까지의 여정은 험난하기까지 했다. 해가 지고 난 뒤 메인 도로가 대낮처럼 밝아지며 향락과 유흥의 기운이 지배했다. 요상한 옷을 걸치고 호객을 하는 여인들을 지나, 술병을 손에 쥐고 왁자지껄 거니는 남성들을 지나, 현기증이 날만큼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지호의 시선을 빼앗는 카지노 샵을 지나야만 했으니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살짝 고민을 했다.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다시 한 번 가볼 것인가, 아니면 자연 그대로의 황량한 땅을 돌아볼 것인가. 어찌 보면 문명의 극과 극 체험이다. 결국 우리는 고민 끝에 후자를 택해 데스밸리 국립공원으로 갔다. 국립공원 안의 캠핑장에서 2박 3일 간 캠핑을 하기로 했다. 옐로스톤의 캠핑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고생하면 어쩌나. 그때는 추위와 싸웠다면 이번에는 더위와 싸우게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 사이에 걸쳐있는 데스밸리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계곡이다. 죽을 만큼 덥기도 하지만, 쓸모없이 버려진 의미에서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드러난 곳이다. 지대가 해수면 아래에 있어 지구 상에서 가장 낮고, 덥고, 버려진 땅이라고들 말한다.
한여름에는 화씨 100도(섭씨 약 37~38도) 이상 기온이 올라간다. 정수리 끝이 불에 탈 듯 화상을 입을 수 있어 30분 이상 서 있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전해질 정도다. 뜨거운 햇볕과 더위를 견디지 못한 동물이나 관광객이 이따금씩 주검으로 발견된다. 우리가 방문한 4월 초에도 꽤 더울 날씨가 걱정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서쪽으로 2시간가량 달려서 110마일 떨어진 데스밸리에 진입했다. 멀리서 탁한 흙색이 서서히 나타났다. 생명의 초록도 매력적인 빨강도 탐스러운 금색도 아닌, 희미한 빛깔이다. 계속 달리다 보니 휴대폰이 끊겼다. 이곳에 머물 이틀간은 외부세계와 완벽히 차단된다는 뜻이다. 고립된 사막 안에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미국에서 여행을 다니며 캠핑카를 총 세 번 빌렸다. 그중 두 번의 캠핑카 여행이 공교롭게도 라스베이거스를 지났다. 그리고 세 번째 방문에 데스밸리를 달리고 있다. 아티스트 드라이브에 진입하자 큰 차는 진입하지 말라는 표지판과 함께 일방통행 길이 나타났다. 우리가 타고 온 캠핑카는 길이 7.6미터, 폭 2.54미터, 높이 3.72미터.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남편은 용감한 듯 무모하게(?) 액셀을 밟았다.
그런데 우리를 에워싼 협곡이 점차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덩치 큰 캠핑카를 비좁은 절벽이 가로막았다. 캠핑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갈 만큼 매우 좁은 길이다. 차가 지나갈 수 있을까? 남편은 핸들을 조심조심 꺾었다. 양쪽으로 높은 절벽이 덮칠 것처럼 아찔하다. 어깨를 스치듯 미로 같던 지그재그 커브길을 힘들게 빠져나왔다.
아티스트 드라이브를 지나오니 멀리서 봐도 암벽에 붓칠을 해놓은 듯한 아티스트 팔레트에 도착했다. 갈색, 붉은색, 노란색을 바탕으로 흰색, 초록색, 파란색, 자주색 등의 색채들이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조물주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색상들을 모아놓을 생각을 했을까? 그 색채들은 해가 뜨고 구름이 걷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예측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매력적인 천연물감이다.
아티스트 팔레트와는 정반대인 조물주의 취향은 악마의 골프코스에서 느낄 수 있다. 어떤 골프 천재가 와도 한 타도 쳐낼 수 없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이곳은 약 2000년 전에 깊이 9미터가 넘는 호수가 있던 자리다. 호수가 증발하며 남은 토양이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보기에도 징그러울 정도로 땅이 거칠다. 혹여나 아이가 넘어질까 조심조심 붙잡고 걸었다.
꺼슬꺼슬한 흙 속에 굵은 소금이 감춰져 있다. 흙이 걷힌 부분에는 탁한 소금덩이가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엄마 이거 진짜 소금 맞아? 아이는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조그만 소금 덩어리를 주워서 캠핑카로 가져왔다. 물에 담가보자. 소금이면 진짜 녹겠지. 양치 컵에 담아서 기다려봤다. 시간이 지나자 소금 입자가 서서히 녹았지만, 모래 입자와 뒤엉켜 딱딱해진 알갱이가 남았다.
데스밸리 안의 모래사막 샌드튠에 가면서는 기대를 많이 했다. 해질녘이라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드는데, 사막의 색깔은 희뿌옇다. 파란 하늘과 선명한 금빛 모래로 온 세상을 선명하게 이분할하던 기존의 사막과는 다르다. 화질이 안 좋은 디카로 찍어놓은 것처럼 텁텁한 색상의 모래 때문이다. 지금껏 가본 사막 중에 가장 지저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캠핑카에서 내려 모래사막을 향해 걸었다. 탁한 사막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다. 캠핑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여행객도 보이고, 가족이 와서 신나게 모래놀이를 즐기는 관광객도 보인다. 몇 걸음 걸어가니 날파리 떼가 날아든다. 팔을 휘휘 저으며 올라갔다. “와, 모래다!” 아이는 신이 나서 모래에 벌렁 드러누워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아이들은 어떤 사막이든 상관없이 모래라면 무조건 좋은가 보다. 이내 주저앉아 모래를 만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와서 살짝 거들었다. 조그만 손에 움켜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스스륵 빠져나간다.
옆으로 가서 앉으려고 보니 바닥에 새겨진 무늬가 심상치 않다. 으악, 이게 뭐야! 뱀이 지나간 흔적이다. 사막 입구에서 본 뱀의 트랙 사진과 똑같은 무늬다. 뱀의 비늘에 있는 무늬가 모래바닥에 그대로 새겨졌다. 뱀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난 뒤였겠지만, 지호를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데스밸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자브리스키다. 캠핑카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탈수증에 죽을 수도 있으니 물통을 꼭 채워 다니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있다. 장난치며 걸어 올라온 지호의 두 뺨이 벌게졌다. 돌담 위에 앉아 생수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아래를 바라봤다. 말이 필요 없는 장관이다. 500만 년 전 호수의 침전물이 물결치는 듯한 거대한 굴곡을 만들어냈다. 돌담에서 내려가 바위에 앉았다. 세상에 뒷모습을 내어준 채 마음 편히 내려다봤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모두 내려놓은 자유가 비로소 완전하게 느껴졌다.
갤런당 5달러? 우리 동네 두 배 값이네. 데스밸리 캠핑장에 다다르니 주유소의 비싼 휘발유 값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격이 이렇게 비싼 건 그만큼 외부에서 접근하기 힘든 곳임을 뜻한다. 캠핑장 안은 의외로 수수한 캠핑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캠핑장에는 부유한 백인 노인들이 대형버스만 한 캠핑카를 끌고 와서 장기간 머무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이곳 국립공원의 캠핑장은 느낌이 또 다르다. 돈이 많든 적든, 직업이나 피부색이 어떻든 간에 진짜 여행을 하러 오는 이들이 많다.
캠핑카 문을 열자 환한 대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땅에서 미처 느끼지 못한 화사함마저 느껴졌다. 한쪽에는 낡은 캠핑카가 주렁주렁 짐을 싣고 허허벌판에 서있다. 그 풍경만으로도 그림 같다. 캠핑카에 있는 고양이들도 모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녁이 되자 이내 서늘한 바람으로 바뀐다. 데스밸리가 이렇게 시원할 리가 없는데...... 이상기온이었다. 4월의 노스캐롤라이나도 기온이 섭씨 10도 대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둠이 깔렸다. 멀리서 기타 현을 튕기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피워놓은 모닥불 불씨가 하늘로 타올랐다. 하늘에는 역시 별이 뒤덮여 있다. 내가 삼각대 없이 별 사진을 찍겠다고 애쓰는 동안, 남편은 피크닉 테이블 위에서 지호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누워서 별을 바라봤다. 별을 담기 위해 벌브셔터로 30초 이상 조리개를 열어놓자, 바람이 솔솔 불어 카메라가 자꾸만 흔들린다. 에잇, 안 되겠네. 사진보다는 눈으로 담자. 카메라 렌즈를 닫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만큼 넓은 데스밸리 한가운데에서 별이 반짝인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뜬 뒤에도 더위는 여전히 한풀 꺾인 채로 있다. 이틀 밤을 보냈던 데스밸리를 떠날 시간이다. 한 시간 가량 캠핑카를 타고 데스밸리를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청량한 하늘처럼 데스밸리에서 서늘한 날씨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고... 그리고 화려한 라스베이거스를 뒤로 하고 데스밸리로 향한 우리의 선택은 옳았다. 버려진 땅에서 세상에 없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늘 그렇듯이 캠핑을 하며 자연 속에서 머물다 보면, 번번이 그곳과 사랑에 빠져버리곤 한다. 꾸미지 않은 황량한 데스밸리가 사람들이 감탄하는 위대한 관광지로 거듭난 이유를 알게 됐다. 모든 게 그대로여서 더욱 좋았던 곳. 죽음의 땅에서 맞이한 선선한 바람 한 점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