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존주의자입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찐 행복 = 행복 + 불행”이라는 공식을 보고 크게 공감했다. 사실 나는 늘 행복만 추구하고, 불행은 피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의 불행이 정말 불행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불행은 행복을 더 깊게 만드는 조미료였고, 때로는 나를 전혀 다른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대학원 시절이었다. 제때 졸업을 못 하면 전문연을 할 수 없었고, 군대에 가야 했다. 연구를 할수록 교수님은 도와주시기보다는 더 큰 숙제를 주는 듯했고, 성과는 잘 나오지 않았다. “논문이 안 나오면 나는 끝이다”라는 압박감 속에서, 친구들이 하나둘 연구실을 떠나 취업할 때마다 남은 일은 내게 쏟아졌다. 불안감과 업무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시절 나는 거의 매일 서점에 갔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샀고, 읽었고, 독서 모임까지 만들었다. 세상은 원래 힘든 거라는 문장들이 나를 위로했고, 나는 그 무의미 속에서 작은 의미들을 만들어내려 애썼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불행은 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나를 길러냈다. 연구실에서 함께 고생하던 사람들은 지금 내게 가장 든든한 인적 자원이 되었고, 잠도 못 자고 울며 준비했던 학회 발표는 내 삶의 중요한 방향키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고 속상할 때는 이제 교수님을 찾아가 웃으며 이야기할 여유가 생겼다. 불행은 단순히 버려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양분이었다.
실존주의는 이런 태도를 명확히 말해준다. 삶은 본래 무의미하다. 불행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불행을 내가 어떤 의미로 다시 써 내려가느냐이다. 불행은 삶의 의미를 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새로 쓸 재료가 된다. 실존주의자가 된다는 건 불행을 피하려 애쓰는 대신, 그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의미를 만든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소진할 필요는 없다. 불행 앞에서 경직하지 않고, 조금은 힘을 빼는 법. 불쾌한 사건이 생겼을 때 억지로 긍정하려 들지 않고, 그저 감정의 파도가 왔다가 간다는 걸 허용하는 것.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인정하는 태도다. 긴장을 풀고, 호흡을 고르고, 하루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바라볼 때 서사는 훨씬 부드러워진다. 힘을 빼면 고통은 덜 아프고, 기쁨은 더 오래 남는다.
결국 실존주의와 힘 빼기는 모순되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불행을 의미의 재료로 삼으라 하고, 힘 빼기는 그 재료를 다루며 에너지를 과소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불행은 내게 의미를 창조할 기회이고, 힘 빼기는 그 과정을 지치지 않고 이어가는 기술이다. 내가 경험한 대학원의 불행도, 지나고 보니 나의 서사를 더 풍성하게 만든 재료였다. 그리고 그 재료를 무겁지 않게 다루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래에는 대학원 시절 (2019-2020) 내가 자주 읽고, 큰 힘을 얻었던 작가들—니체,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장 폴 사르트르—의 작품들을 읽고 남긴 짧은 기록들을 담았다. 그 시절의 독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버텨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 글들은 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내 삶을 지탱해 준 기억의 조각들이기도 하다. 그때의 조각들을 소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나는 프랑스 혁명에서 세계 1차 대전까지, 후기 근대의 문학과 철학을 좋아한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 시대를 괴롭혔던 물질주의, 이기주의, 퇴락한 문화, 인간을 제도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국가·경제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어떤 것은 심각한 문제로, 어떤 것은 너무 당연해져 문제로조차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근대 철학자들의 눈을 빌리면, 세상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중심에는,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가 있다.
서양의 역사와 정신은 플라톤 이래의 전통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니체는 중세 이후 이어져 온 이 전통을 송두리째 깨뜨리며, 실존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의 사상이 응축된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에서 이름을 빌려온, 니체의 정신적 분신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를 넘어섰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를 욕망과 고통에 사로잡힌 존재로 보고, 욕망을 끊어내야만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달랐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선언하며, 인간은 단순한 생존 욕망이 아니라 **힘을 느끼고 강화하려는 욕망(힘에의 의지)**의 존재라고 보았다. 욕망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초인은,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고, 강인하고 명랑한 정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인류의 목적은 바로 이 초인을 낳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인생의 고통을 이해해 보고 싶어 자기계발서 대신 니체를 집어 들었다. 최근 내 삶의 의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잘못된 철학을 가진 한 사람이 주변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도 보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니체를 읽으며 칸트에서 하이데거까지 이어지는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재미도 있었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들을 마주하며 반성할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쉽지 않았다. 말세인에서 초인으로 나아가는 고통은, 오히려 말세-말세인으로부터 말세인으로 퇴행하는 오늘날의 고통보다 덜할지도 모르겠다. 안정된 직장, 안락한 가정, 평범한 행복을 꿈꾸지만, 그 길조차 죽을 만큼 힘든 것이 현대인의 현실이다. 행복을 찾으려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우리에게 도전한다. 고난과 무기력 속에서도, 기쁘고 밝게 다시 일어서는 것.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면서, 그것을 힘으로 전환하는 것. 그 길 위에서만 우리는 초인을,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
히틀러의 나치즘 아래에서 숨죽이던 유럽인들은, “부조리한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을 그린 카뮈의 작품에 열광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소설 이방인. 같은 해에 발표된 시지프 신화는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헌 중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개인적으로 읽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다. 매끄럽지 않은 논리와 난해한 문장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카뮈의 핵심 주장과 그 속에서 내가 시지프에게서 얻은 작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된다. 1~3부에서 카뮈는 ‘부조리’의 철학을 정리하고, 4부에서 시지프의 신화를 끌어온다. 부조리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태, 곧 ‘무의미’다. 우리가 문득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혹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부조리와 마주한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생의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의 충돌”이라 정의한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반항 → 자유 → 열정이다. 삶이 무의미해졌을 때, 흔히 사람들은 자살하거나, 초월적 관념(희망)에 기대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카뮈는 이를 자기 기만으로 본다. 대신 그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반항할 때 비로소 자유가 생기고, 자유 속에서 삶은 다시 열정으로 충만해진다고 말한다. 내일 죽을지 모른다면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 바로 그 질문 속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카뮈가 말하는 열정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는 신을 기만한 죄로 끝없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를 밀어 올리면,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다시 올려야 하는 무한 반복. 성취 없는 고통이지만, 시지프는 도망치지 않고 자기 운명을 직시한다. 오히려 그 안에서 초연함을 배우고, 조건이 아닌 자신의 인식과 노력으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일군다.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와도 닮았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다 퇴근하고, 다시 잠드는 반복된 삶. 혹은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흥미를 잃고, 의미를 찾아 철학책을 붙잡는 나 자신이 바로 시지프의 전형이 아니던가. 내가 배운 교훈은 단순하다. 버텨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른다. 피할 수 없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반항과 자유, 그리고 열정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카뮈가 말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바위 같은 괴로움 속에서도 좋아하는 술 한 잔, 책과의 만남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는 실존주의를 부정했지만, 동시에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문호다. 사실 실존주의는 학자마다 정의가 제각각이고, 스스로 실존주의자임을 거부하는 이들조차 많다. 핵심만 말하자면, 실존주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정되지 않았으며, 스스로 선택을 통해 존재를 창조한다”는 사상이다. 인생은 본래 불합리하고 무의미하다. 그 무의미 속에서 몸부림치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실존주의다.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이런 부조리 문학의 전형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무관심과 냉담으로 일관한다. 어머니의 죽음조차 담담히 받아들이고, 연인과의 결혼도, 이웃의 부도덕한 부탁도 무심히 수락한다. 결국 태양이 눈부셨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살해하고 재판에 서게 된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식민지 아랍인’의 죽음은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재판은 그의 범죄보다 ‘태도’를 문제 삼는다. 결국 그는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낙인찍히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감옥에서조차 평온하다. 죽음을 앞두고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앞두고 행복하다니… 이 불가해한 태도는 독자와 등장인물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카뮈는 뫼르소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가식 없는 솔직한 인간이라 해석한다. 사회의 관례대로 죄책감을 ‘연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태도를 오히려 진실에 충실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적 결론이다. 무관심한 세계 속에서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충실하려는 태도. 뫼르소는 부조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주하며 자기만의 자유를 얻는다. 그는 방관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 인물이다.
이방인은 1942년,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발표되었다. 황폐한 시대 속에서, 뫼르소의 ‘무관심 속의 평온’은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큰 울림을 주었다. 절망적인 현실을 견디는 한 방식으로 실존주의가 대중화된 것이다. 오늘날도 카뮈가 다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 대신 팬데믹과 착취, 불안과 우울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카뮈는 여전히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세상은 본래 부조리하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혹시 이 말이 와닿는다면, 당신도 모르게 이미 실존주의자일지 모른다.
< 변신 / 유형지에서, 프란츠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의 삶과 글은 “소속되지 못한 인간”의 초상과 닮아 있다. 다민족·다종교 사회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인답게 살지 못했고, 독일 교육을 받았지만 독일 문화에 녹아들지도 못했다.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갈등은 그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고, 글쓰기는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이유도 모른 채 불합리한 운명에 던져지고, 결국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의 배경과 맞닿아 있다.
「변신」은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는 더 이상 노동할 수 없게 되고, 가족들마저 점점 그를 외면하며 소외시킨다. 벌레가 된 주인공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지만, 사실 카프카가 말하는 “벌레”는 단순한 괴물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능력을 잃은 개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며, 또한 스스로를 벌레처럼 여겨 버리는 내면의 상처다. 100년 전 그레고르가 죽었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는 약자를 벌레 보듯 바라보고, 스스로도 가치 없는 존재처럼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유형지에서」는 더 충격적이다. 죄명조차 알 수 없는 죄수의 몸에 바늘로 죄명을 새기는 기계, 그리고 이 제도를 맹신하는 장교. 그러나 탐험가의 무심한 시선 속에서 장교는 끝내 기계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산산이 부서진다. 이 작품은 산업화로 넘쳐나는 기계를 통제하지 못한 유럽 사회와, 잘못된 제도에도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잘못된 권력과 제도는 결국 스스로 붕괴하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사람도 함께 몰락한다.
카프카의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현대인의 소외와 무력감, 그리고 실존적 불안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니체가 말했듯, “자기 시간의 2/3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다. 「변신」 속 벌레와 「유형지에서」의 장교는 결국 자유를 잃은 인간의 모습이며,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은 절망만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는 어떤 제도와 시선의 죄수인가? 나는 벌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것인가? 실존주의는 여기서 시작된다. 인생은 본래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 시골 의사, 프란츠 카프카 >
카프카의 작품은 언제나 불친절하다. 설명은 부족하고, 비유와 은유는 과도하다. 그러나 그 모호함 덕분에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며,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남긴다. 「시골 의사」는 특히 카프카 문학의 핵심—경계와 방황, 불확실성과 부조리—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야기는 한밤중 눈보라 속에서, 의사가 급한 환자를 보러 떠나는 장면으로 돌연 시작된다. 말은 죽어 있고, 말을 빌려준 마부는 하녀를 위협하지만, 의사는 우왕좌왕하다가 떠난다. 배경 설명도 없고, 인과 관계도 없다. 그저 갑작스레 삶이 시작되듯, 소설도 그렇게 시작된다. 이는 곧 인생의 은유다. 대비할 틈도 없이 사건은 닥쳐오고,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채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떠밀린다.
소설 속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있다. 심지어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벌을 받아도 된다”라는 사회적 압박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로 보기보다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의사라는 직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SNS 속 다양한 ‘부캐’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에 맞춰 살아가며, 정작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잃어버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의사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외투마저 빼앗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마차에 실려 또 다른 길로 나아간다. 시작은 갑작스럽고, 결말은 희망이 없다. 그 속에서 의사는 깨닫는다. 자신은 자의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끌려 다니는 존재라는 것을.
카프카는 「시골 의사」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삶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과연 자의에 의해 살아가는가, 아니면 사회적 의무와 역할에 의해 내던져진 삶을 살고 있는가? 실존주의는 여기서 답을 요구한다. 인생은 본래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 소송, 프란츠 카프카 >
카프카는 생전에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으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이를 어기고 남겼기에 오늘날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미완성 장편 「소송」은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주인공 요제프 K는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된다. 그는 끝없이 법정을 드나들며 사건의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는 무력하게 몰락한다. 추리소설처럼 사건은 수수께끼로 가득하지만, 독자는 절대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결말은 당연히 비극이다.
읽다 보면 답답함을 넘어 질식할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답답함이 작품의 힘이다. 법정의 탁한 공기는 곧 내 삶의 공기로 읽히고, 이유 없는 체포는 사회와 제도에 묶인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처럼, 하루하루를 의무와 규율 속에 살아간다. 니체가 말했듯, 자기 시간의 2/3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다.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방법을 모르고, 결국 무기력 속에 하루를 흘려보내는 이유다.
그럼에도 카프카는 우리를 멈춰 세운다. 「소송」은 단순히 부조리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묻는다. 나는 무엇의 죄수인가? 나는 자유로운가? 결말은 암담하지만, 질문은 살아남는다. 바로 이 질문이 실존주의 철학과 만난다. 인생은 본래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 목적의식을 창조하는 일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 말, 장 폴 사르트르 >
나는 책장을 열며 내 머릿속에 있던 사르트르를 찾고 있었다. 카페 드 플로르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와인을 마시며 철학을 논하는, 파리지앵 철학자의 모습. 그러나 자서전 『말』 속에서 내가 만난 사르트르는 전혀 달랐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무용성을 절실히 느낀 꼬마. 글을 읽고 쓰는 행위로만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 했던, 건방지면서도 귀여운 천재였다.
사르트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며, 조부의 서재를 놀이터이자 성소처럼 삼았다. 그는 책을 읽으며 어른들의 관심을 끌고, 신동으로 칭송받으며 자신이 “여분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 신동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소품일 뿐,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이 어린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사르트르는 기댈 곳이 자기 자신뿐임을 깨닫고, 책 속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상상의 유희로 현실을 버텼다. 읽고 쓰는 과정 속에서 그는 배우에서 창조자로, 영웅에서 작가로 스스로를 변모시킨다. 어린 사르트르에게 “나”란 곧 “글을 쓰는 나”였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작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사제이자, 진선미를 위한 순교자라는 환상을 그는 품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글쓰기는 사후의 명예를 보장하는 수단이 되었고, 언어로 남겨질 영광이 그의 삶을 정당화했다. 결국 『말』은 사르트르의 유년기 전체가 어떻게 ‘문학병’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자서전이다. 그는 종교 대신 문학을 통해 존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찾았고, 이후 평생 글쓰기에 사로잡혀 살았다.
책을 덮으며, 나는 사르트르가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아 철학을 붙든다. 어린 사르트르가 문학을 통해 의미를 발명했듯, 나는 반도체라는 전공을 붙잡고 살다가 뒤늦게 문학과 철학을 몰래 읽는다. 만약 사르트르가 공과대학을 다니고 해군 장교가 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그의 인생은 『말』이 아니라 『반도체』 같은 이름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나의 삶과 그의 삶이 묘하게 겹친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인생을 우연으로부터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언제나 부조리하고 무용하게 느껴지지만, 쓰고 읽는 순간만큼은 존재의 근거를 찾는다. 그리하여 사르트르가 영웅의 환상 끝에 ‘작가’를 발견했듯, 나 또한 글을 쓰며 나를 발견한다.
결국 『말』은 한 철학자의 성장 소설이자, 실존주의의 씨앗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실존주의는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관심받지 못하는 존재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사르트르의 고백은 쓸데없는 위로보다 더 솔직하다. 그 자랑스러운 지적 허세와, 무용성을 버티려는 몸부림이, 내 마음을 이상하게도 위로한다.
<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러시아 문학은 언제나 고통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두껍고 낯선 이름들 때문에 쉽게 펼치기 어려운 책이지만, 한 번 빠져들면 러시아 고전만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유럽 고전과는 다른 차가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죄와 벌』은 그 가운데서도 인간 존재와 죄,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청년으로, 선택받은 소수의 ‘초인’은 다수의 평범한 대중과 달리 어떤 행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초인이라 여기며, 정의 실현을 명분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목격자(노파의 동생)까지 죽이면서, 스스로 정의의 모순을 범하게 된다. 자유를 얻기 위해 저지른 살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유도 정의도 얻지 못한 채 세상과 단절되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혐오를 느끼며 무거운 부자유 속에 갇힌다.
작품은 급격한 도시화 속 빈부격차, 매춘, 알코올 중독 등 사회문제를 배경으로, 죄와 벌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훔친 금품조차 역겨워 땅에 파묻고, 자신이 초인이 아니라는 자책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끝내 그는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매춘부 소냐의 권유로 자수해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게 된다. 소냐는 사회 최하층의 인물이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선한 양심만큼은 지켜낸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와 함께 유형지로 향하며 죄수들에게 성녀와 같은 존재가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 죄에 맞는 벌을 받는다. 육욕에 빠진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거짓으로 신망을 얻으려던 루쥔은 모든 것을 잃는다. 반대로 소냐는 매춘부라는 낙인을 짊어지고도 선한 양심 덕분에 영혼의 구원과 회복을 얻는다.
유형지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전염병이 퍼져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판단만 옳다고 믿으며 서로 죽이는 꿈을 꾸게 된다. 절대적인 죄의 기준이 사라진 세상은 곧 지옥으로 변하고, 그는 비로소 자신의 오만한 사상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깨닫는다. 시베리아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소냐의 믿음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눈물 속의 속죄와 사랑을 경험한다. 죄책감 없는 자수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눈물과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비로소 이해한다. 살인자와 매춘부라는 기묘한 만남은, 결국 회복과 구원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죄와 벌』의 결론은 명확하다.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며, 그 기준은 개인의 합리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양심과 죄의식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사랑과 기쁨,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주조된 자유(coined liberty)’라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은 돈보다 더 깊은 인간의 자유를 탐구한다. 그는 젊은 시절,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가 반란 음모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당했고, 그곳에서 성경을 탐독하며 인간과 신, 자유와 속죄에 대한 사유를 깊게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돈, 사회 제도, 인간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도 결국 구원과 사랑이라는 종교적·철학적 주제를 향한다.
『죄와 벌』은 단순히 살인자의 범죄와 처벌을 그린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며 죄와 고통 속에서 어떻게 구원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실존의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