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모든 것이 더 빛나는 게 아닐까?”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생화학자였다. 그는 일찍이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열역학 제2법칙).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하다. 너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며, 인생의 의미란 없다.”
일곱 살의 아이가 들었을 때 그 말은 단호하고 차가웠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뭐하러 해요? 학교는 왜 가요?”
그 질문이 오랫동안 그녀를 붙들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청소년기는 자살 충동과 시도로 얼룩졌다. 대학에서 몇 년을 두고 사랑한 곱슬머리 남자와 함께 살며 겨우 ‘안식처’를 찾았다고 믿었을 때, 여행길의 한 실수와 고백으로 그 인생은 무너져내렸다. 떠난 그를 돌려세우려 편지를 쓰고 기다렸지만, 2년, 3년이 지나 희망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흐려질 즈음, 그녀는 한 과학자를 떠올린다.
스탠퍼드 초대 학장이자 어류 분류학의 거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
룰루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려는 한 인간의 집요함에서 살아갈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조던은 당대 알려진 물고기의 5분의 1에 이름을 붙였고, 표본을 유리단지에 담아 질서 정연한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그러던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수천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깨졌다. 에탄올이 흘러넘치고 살점이 흩어졌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이름표’가 바닥에 흩어진 일이었다. 어떤 표본이 어떤 이름인지 구분이 사라지면, 30년의 성과는 그 자리에서 증발한다.
그때 조던은 바늘을 집었다. 물고기 몸에 직접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재앙도 물고기와 이름을 분리시키지 못하리라.”
혼돈을 통제하겠다는 의지, 혹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무시무시한 낙천성의 방패였다.
나 역시 한동안 ‘그릿(Grit)’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있었다. 긍정적 피드백이 없어도 장기 목표로 로봇처럼 뛰어드는 끈기. 실패와 역경 앞에서도 흥미를 유지하는 힘. 학교를 벗어난 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자책했고, “왜 나는 회복탄력성이 부족한가?”라는 질문에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부르디외가 회복탄력성을 아비투스라 불렀다는 문장을 읽을 때는 더 깊은 구멍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던에게서 시지프의 그림자를 보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기대를 부순다. 그릿은 회복을 돕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긍정적 착각을 방패 삼아 사실을 왜곡하고, 방해물을 ‘사악한 힘’으로 공격하게 만든다. 조던은 파리를 잡겠다고 대포알을 쏠 만한 사람, 낙천성의 방패로 비판을 튕겨내며 결국 우생학이라는 잘못된 사다리를 세운 사람이다. 혼돈을 제압하려는 의지가, 타자를 제압하는 제도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룰루는 결정적인 반전을 꺼내든다. 1980년대 ‘분기학’의 도래.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기준으로 친연관계를 재구성해보니,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속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비슷한 외피 때문에 편의상 묶어 부른 이름—‘어류’—는 인간 중심적 감각의 산물일 뿐, 진화적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조던이 평생 집착한 사다리의 디딤돌이 애초에 허공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은 그래서 과격한 선언이 아니라 더 정밀한 진실이다. 이름은 질서를 주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게 만든다. 한 번 범주를 붙이면, 그 이름이 가리는 세목(細目)들을 다시 보지 않게 된다. 우리의 ‘질서’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세계를 삭제하는가.
나는 여기서 내 오늘을 떠올린다. 최근 자전거를 타다 다치며 모든 계획이 엎어졌다. 계획표의 칸들이 비어가자, 나는 또다시 스스로를 탓했다. “왜 너는 회복탄력성이 부족하니?” 그런데 룰루는 말한다. 혼돈을 통제하려는 자기기만에도, 혼돈 앞에서 모든 의미를 포기하는 허무에도 기댈 수 없다면, 혼돈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사다리를 걷어차고도 서 있을 수 있는 마음.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엇을 얻는가?
별을 포기했을 때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얻었듯, 편리한 이름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진짜 세계를 얻는다.
그 진짜 세계에는 ‘민들레 법칙’이 있다. 누군가에게 잡초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약초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다윈이 말했듯 인간의 눈은 오류투성이다. 자연의 기준은 단일하지 않다. 그러니 ‘정상’이라는 사다리를 세우는 순간, 우리는 다양성의 생득적 가치를 지워버린다.
이 직관을 인간관계와 정체성으로 가져오면 더 또렷해진다. 사회는 여전히 “남녀의 만남”을 기본 질서로 삼는다. 다른 기본들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말과 제도는 습관적으로 하나의 사다리만 반복한다. 편리하고, 안전해 보이고, 설명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다리를 내려놓아야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룰루는 곱슬머리 남자를 포기한 뒤, 예상치 못한 사랑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돌아보면, 나는 ‘그릿’이라는 이름표를 내 이마에 꿰매고 살았다. “밤샘은 당연, 주말 근무는 부담조차 아님.” 스스로를 공장처럼 압착하며 불안을 달랬다. 더 많이 벌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까.
이 책은 조용히 말한다. 질서를 사랑하되, 그 질서가 타인을 지우거나 나를 속이기 시작할 때는 손을 떼라. 회복은 근육이 아니라 눈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름을 덜 믿고, 더 자주 다시 본다면, 혼돈 속에서도 여백이 보인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첫 장의 헌사가 떠올랐다.
“아빠,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에요.”
아버지의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에 맞서 룰루가 발견한 결론은 단순하고 단단하다. 모든 것은 중요하다. 다만 그 중요함은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라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물고기가 ‘없다’고 말할 용기는, 결국 누군가를 ‘있게’ 만드는 용기다.
그러니 나는 오늘 내 책상의 계획표를 조금 비워둔다. 이름표를 덜 꿰매고, 덜 단정하며, 더 오래 바라본다. 혼돈을 인정하되, 그것이 곧 무의미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 질서로 세계를 봉인하지 않고도, 의미는 자란다는 것.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이렇게 적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더 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