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지 않은 우울증

"예민하다는 건 늘 불편한 낙인이었다."

by 박루민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친구가 농담처럼 내게 말했다.

“현이 짧을수록 더 예민하다던데. 그래서 바이올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민해서 싫어.”
그 말에 웃어넘겼지만, 한편으론 찔렸다. 사실 나는 예민하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도 내겐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음악에서 예민함은 흠이 아니라 섬세함의 조건이다. 현악기의 긴장과 미묘한 떨림이 아름다운 울림을 만들듯, 성격에서의 예민함도 단순한 약점만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는 예민함을 곱게 보지 않는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 “그냥 둔감해져라” 자라며 수도 없이 들었던 말들이다. 그러나 내게 예민함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신경계의 구조 같은 것이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알아채지 못하는 표정을 읽고, 공기 중에 떠도는 감정까지 느낀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딜 가나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대방이 원하는 걸 읽고 맞추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늘 컸다. 관계 속에서 나는 쉽게 소모됐고,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점점 흐려졌다. 힘들다고 말할 땐 이미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복구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했다. 나는 좋은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히 예민한 사람일까.


이런 내 모습은 심리검사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겉으로는 밝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결과지는 늘 나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혹은 ‘우울 경향이 큰 사람’이라고 분류했다.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정말 우울한 걸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울증이란 눈물과 침울함만으로 진단되지 않는다. 활력이 줄고, 감정이 무뎌지고, 삶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우울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니 나는 크게 우울하지 않은데도, 피로와 혼잡한 내면이 우울처럼 보이는 것이다.


과학은 이 현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설명해준다. 높은 감각 처리 예민성(Highly Sensitive Person, HSP)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 자극을 훨씬 많이 받아들이고, 신경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처리하려 한다. 문제는 입력이 많으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도 많다는 점이다. 작은 불빛, 낮은 소음, 타인의 기분 변화까지 모두 감지하다 보면 몸은 늘 긴장 상태에 머무른다. 교감 신경은 쉽게 켜지고,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된다. 활성산소가 쌓이고 염증 반응이 늘어나면서, 세포 속의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손상된다.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면 세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피로와 불안, 집중력 저하가 찾아온다. 예민함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몸속 에너지 대사와 직결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더 흥미로운 건, 예민한 사람은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예상만으로도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시험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표정 하나로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경계가 늘 경계 태세에 있기 때문이다. 회복할 시간을 놓치면 금세 고갈되지만, 다행히도 뇌와 신경계는 다시 연결되고 재구성된다. 이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부른다. 충분한 수면, 규칙적인 운동, 호흡 훈련 같은 단순한 습관이 신경계를 회복시키고, 예민함이 소진이 아닌 통찰력으로 작동하게 만든다.


나는 특히 연애에서 이 예민함을 절실히 느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잘 보여서, 맞춰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방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 했지만, 나는 내 에너지가 바닥나는 걸 매번 느꼈다. 상대방의 감정에만 신경을 쏟다 보니 내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쯤이면 이미 회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걸 보지 않으려 애쓰고, 내 마음이 원하는 것으로 관계를 채우려 했다. 쉽진 않았지만, 그래야만 내가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울한 걸까?”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느끼는 나로서 어떻게 살아갈까?”라고. 나는 크게 우울하지 않다. 다만 예민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색조와 파장을 느끼며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때로는 우울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내 안의 또 다른 감각 구조일 것이다. 남들이 지나치는 미묘한 떨림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힘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선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공감’을 ‘연민’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너무 깊이 끌어안는다. “너의 고통 = 나의 고통”이 되어버리면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그러나 연민은 다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되,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는 네 고통을 존중하며 바라본다. 하지만 내 감정은 나의 것이다.” 이 경계가 세워질 때, 예민함은 나를 무너뜨리는 약점이 아니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힘으로 바뀐다.


돌아보면 예민함은 내게 고통만 준 것이 아니었다. 예민하기에 나는 타인의 작은 표정에서 진심을 읽고, 흔들리는 말투에서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배려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섬세한 감각을 어떻게 다루느냐였다. 예민함은 억눌러야 할 결점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감각기관이다. 세상을 더 섬세하게 듣고, 보고, 느끼게 해주는 감각. 그것을 잘 조율할 때, 삶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깊고 풍요로워진다.

이제 나는 예민함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예민함과 친해지고 싶다. 상대방의 기분에 끌려다니기보다 나의 기쁨과 욕구로 관계를 채우고, 공감 대신 연민으로 나를 지켜내려 한다. 그렇게 할 때 예민함은 나를 힘들게 하는 적이 아니라, 내가 세상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선물이 된다.




글이 너무 무거워져서, 마지막에 재미난 제 영상을 하나 공유합니다.

비비의 밤양갱을 밤양갱으로 진지하게 연주하는 영상입니다. 어이없어서라도 꼭 한번 웃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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