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주사위

by 뤼미셀

세 사람의 행복 앞에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다.


첫 번째 사람은 남편이다. 고양이를 잃은 불행 앞에 무너진 사람, 실의의 늪에 빠진 사람이다. 그가 뭘 원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묻지 않았으니 당연하지만 어쩌면 나 자신보다 소중한 그를 위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사람은 아이다. 그 어떤 미래도 점칠 수 없는, 나와 내 남편이 어떻게 길을 안내하느냐에 따라 삶은 축복이오, 혹은 고행이라고 말할 사람이다. 우리 두 사람에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안겨줄 사람이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너를 이만큼 기다렸노라고 설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또는 누군가를 대신하기 위해 너의 탄생을 택했노라고 말할 때 아이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본인의 뜻과는 달리 억지로 세상에 발 디딜 수도 있는 존재다.


세 번째 사람은 나다. 한때 분명하다고 여겼던 가치관은 무너지고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젓는 결정 장애자다. 이래도 흥, 저리도 흥, 원해도 안 될 일이 될 수 있는 나이. 주변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저울질하느라 아직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못난이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번 결정은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오늘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무딘 돌도 긴긴 시간 떼고 갈면 날 선 도끼도 되고 망치도 된다더니 세월로 학습이 되었나 보다. 돌처럼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내 망설이는 눈빛 하나, 굳어진 얼굴에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입을 뗀다.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듯, "왜? 무슨 일 있어?"


대화의 주제는 간단하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가 두렵다. 혹시 생각이 바뀐 건 아닌지,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그려본 적 있는지 물어보면 되는 건데 왜 자꾸 망설이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아니다, 모르긴 뭘 몰라. 생각은 바뀔 수 있으나 내 나이와 몸은 바뀔 수 없으니 혹시나 원해도 안 될 수도 있을 일에 지레 겁을 먹어 이렇다.


그래도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으니 던져진 주사위에 우리의 운명을 맡긴다.


"혹시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니?"


이런 화법이 좋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짧은 프랑스어를 핑계 삼아 내가 원하는 바를 감추고 내가 이렇게 해 주길 바라느냐고 묻는다. 마치 상대가 원해서 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할까? 어떻게 생각해?"가 아닌, "이렇게 하길 바라니?". 결국 이 말은 결정을 상대에게 미뤄버리는, 도망자의 화법이다.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할 법도 한데, 바로 대답이 따른다. "아니." 오히려 질문을 던진 내가 당황한다.


금기시되어 온 주제인 고양이 애기의 죽음과 조카 이야기를 꺼낸다. 애기로 인한 너의 상심과 조카를 향한 기쁨을 보았노라고……. 네가 원한다면, 아이로 인해 네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생각을 바꿔 볼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묻는다. 언제나 나보다 네가 더 소중한 나는,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다만 내 몸 상태가 가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내 상상력은 1년쯤 훌쩍 내질렀다.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고 기대를 꺾어 놓고야 마는, 그래야 실망이 없다고 여기는 이 망할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까? 내 머릿속의 난 이미 난임을 겪는다. 아이의 의사가 최우선이라며 아이를 낳길 거부하던 시기를 지나 왜 우리에게 오지 않느냐며 불행해한다. 아이의 의사가 중요하기는 했던 걸까? 이 불행한 시나리오의 끝은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정한 채 아이를 원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남편인데 또 내가 운다.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이 위로하는 아이러니. 내가 아이 낳길 두려워하는 이유 중 또 하나다.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에 나는 늘 너무 약하다.


가만히 나를 토닥이며 남편은 말한다. 생각이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같다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그의 말. 그리고 혹시 내가 아이를 원하는 거냐는 그의 물음. 아니라는 고갯짓에 그럼 아무 문제가 없다고 또 나를 토닥인다. 난 또 얼마나 혼자 망상에 빠져 헛발질을 한 건가 싶다가도 이번에야말로 그의 속내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다. 내가 우기고 우겨 아이를 원했던 그의 마음이 쏙 들어갔던 지난 과거를 들추어 꺼낸다.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또다시 가로젓는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 지금 우리 삶이 불행하다는 건 아니지만 인생은 고해라는 부처의 말에 공감한다는 그의 말. 앞으로는 사는 게, 살아내는 게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는 세상을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는 고백에 우리 두 사람은 던져진 주사위가 멈춰 선 그 자리, 우리 세 사람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과연 우리는 이 선택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결정에 아이도 동의할까? 비관주의자 부모 밑에서 크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너의 영원한 행복을 빈다. 여전히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고,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숱한 날을 새며 했던 답 없는 고민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이 불행한 시나리오로 이것이 지금 당장은 제일 나은 선택이라 여기기로 한다.


만나지 않아서 다행인 우리 세 사람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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