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를 찾아서』
어느 날 갑자기 스물다섯의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기엔 나이 든 몸이 따라가지 않았고, 수십 년의 시간을 잃어버린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김혜자·한지민 주연의 드라마 <눈이 부시게> 이야기다. 젊은 '나'를 그리워하며 시간을 초월하는 타임슬립 드라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커다란 반전이 있었다. 주인공이 시간을 잃은 설정은 알고 보니 알츠하이머 할머니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라는 것. 마지막 회에 밝혀진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드라마의 전개에 소름 돋았고, 우리 부모 세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내가 본방사수하며 봤던 인생 드라마로 남았다.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이 없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 재작년 인생 최고의 우울감을 느꼈을 때는 어제 겪은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 매우 놀란 적이 있다. 다행히 몸이 회복될수록 기억력도 좋아져 그때의 걱정은 잊고 산다. 기억하고 싶은 일은 다이어리에 꼭 적어두지만, 나중에 일기를 다시 볼 땐 처음 보는 것 같아 또 새로운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는 변연계의 일부로 측두엽에 위치한다.(변연계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포유류의 뇌로 감정의 중추 및 위험 감지, 생존에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중심이라고 살폈다.) 해마의 모양이 물속 해마와 유사하여 히포캄푸스(hippocampus, 말-바다의 괴물)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해마는 기억이 성숙해져서 뇌의 피질에 고착될 때, 즉 스스로 강해져서 헤쳐나갈 수 있을 때까지 붙잡아 둔다. 기억 인큐베이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심리학책에 꼭 등장하는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에빙하우스는 망각은 학습 직후 20분 이내에 급격하게 일어나며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 및 분산 학습이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로 이후 학습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억과 망각은 한 세트이다. 망각 하지 않는다면 기억해야 할 정보가 많아 새로운 정보를 채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망각은 중요한 것만 선별해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망각은 왜 생기는 것일까?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첫째, '주의'이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서 그 외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즉 사진에서 주인공은 나이고, 그 외의 것은 전부 배경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 작업 기억(단기 기억)이다. 기억 중 가장 약한 부분으로 공간이 제한되어 20초 정도만 유지된다. 작업 기억은 언어적 단위의 저장인 음운 루프(언어의 음을 기억하는 층)와 시각적 정보를 나타내는 단위로 구성된다. 새로운 단어가 귀로 인식되면 대뇌피질에서 언어의 음으로 해석되고 음운 루프로 보낸다. 안 그래도 제한된 공간인데 걱정과 같은 다른 생각이 공간을 차지하여 작업 기억이 더 혼란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에서 망각은 흔한데 증세가 심각해서 기억과 싸워야만 하는 질병이 있다.
우울증_ 우울한 마음에 근심 걱정으로 작업 기억을 채우면 다른 일을 채울 공간이 부족해서 기억력이 감퇴한다.
뇌전증_ 뇌 기능 장애인 뇌전증 중에서도 특히 해마가 있는 측두엽에서 생기면 해마가 손상되어 기억력 감퇴를 동반한다.
뇌의 외상_ 외상은 가장 심각한 손상으로 뇌의 여러 방향에서 기억이 침해를 받는다. 손상된 기억력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므로 외상이라는 사건 자체는 급성이어도 결과는 만성적인 질병이다.
알츠하이머_ 알츠하이머는 망각 중 가장 공포의 대상이라는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어린 시절과 젊었을 때의 이야기는 자세히 하지만 최근을 기억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름이나 메시지, 어제 한 일이 기억나지 않다가 해마가 제일 먼저 손상되니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없는 원리라고 한다. 알츠하이머의 원인은 뇌의 치석 같은 노폐물이 신경을 방해해서 뉴런이 자살한다는 설명이 가장 널리 퍼졌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성장 기억상실증_ 태어날 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가 부족하면 해마가 손상되기도 한다. 선천성 해마 손상.
역행성 기억상실증_ 일반적으로 기억력이 감퇴하면 옛날보다는 최근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인데 특이한 경우로 뇌에 저장한 기억이 갑자기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기억에 구멍이 생기는 질병을 겪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장면과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한다. 즉, 허위 기억으로 채운다. 경험한 일을 재구성해서 기억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기억의 일부도 재구성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생각 나지 않는 경험은 구멍 난 기억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채우며,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실일지라도 내가 의미를 부여한 대로만 기억하니까 결국 내 기억도 상상의 결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꿈을 꾸는 존재이며, 꿈의 뿌리는 기억에 있다. 기억은 환상의 재료이다. 그리고 환상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 일어나는 일을 상상하는 것이다. 세부의 기억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 어땠는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억이 경험의 물결처럼 의식으로 밀려들어 올 때는 이미 재구된 것, 서로 이어지는 이미지와 이야기로 새로 엮인 것이다.
p.315
기억의 구성 과정은 기억을 점령하고, 원래의 기억은 흔적 하나 없더라도 그 경험들을 살아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제 경험의 '허위' 기억을 저장한다. 이런 구조는 아주 초기에 생겨날 수도 있고, 계속 살아남아 '진짜' 기억처럼 느껴진다.
『해마를 찾아서』p269
기억이 상상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조금 충격적이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한순간에 지워낼 수는 없지만, 그보다 조금 약한 반응과 함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수치심 같은 감정도 상상을 통해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대중 앞에서 발표를 잘 마친 후 박수를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로 설레는 것처럼 기분 좋은 상상을 많이 하면 실제로 긍정적인 기억을 더 많이 보관할 수 있지 않을까? 읽을 기회가 많을 것 같지 않을 특이한 책이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알츠하이머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반찬을 해온 며느리에게 안 좋은 형편을 모른척해서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다음날 시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붕어빵을 사간 며느리를 기억하지 못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결국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들은 자기가 힘들게 산 모습을 어머니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함께 웃는다.
기억에 구멍이 난 사람들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당연히 주인공이다. 곁에 있는 사람은 기억을 잃은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들은 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만 남을 때까지 망각하는 건 아닐까?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
우리가 기억하는 것 중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누구인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망각에 대한 진실은 우리 모두 망각과 함께, 망각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잊게 되더라도 제일 중요한 일들이 우리 기억에서 분명한 형체로 드러나도록 조각해 내는 일을 망각이 하도록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해마를 찾아서』p303
참고도서_ 『해마를 찾아서』(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민음사)
사진_ 드라마 <눈이 부시게> 공식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 <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