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저녁 식사를 하며 뉴스를 보다가 뜨악한 기사가 있다. 수면내시경을 받은 환자가 휴대폰으로 검사 과정을 녹음한 내용을 들었는데 의사들이 환자의 험담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의사는 '이 환자를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바쁜 월요일 아침부터 젊은 사람이 왜 검사를 받느냐'는 등 누가 들어도 불쾌한 말이었고 의사에게 항의하니 오히려 본인이 진료를 받아서 다른 환자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며 타박했다고 한다.
나는 몸이 약한 편이라 어릴 때부터 병원과 친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여러 군데의 병원에서 여러 과를 돌며 진료와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니 수면 검사를 받을 때나 마취를 하는 수술 중에 의료진이 나를 물건 취급하거나 수치심이 드는 행동 및 발언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그동안 아침 일찍 검사를 받는 나를 향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의료진도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우 불쾌해졌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나. 병원을 찾는 이유는 힘든 마음을 토로하며 왜 아픈지 원인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즉, 위로와 치유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증상을 이야기할 때 듣는 둥 마는 둥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말을 자르는 의사를 종종 만났다. 이러한 반응에 내 고통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아 진료비가 아까워 검사를 취소하고 병원을 옮기기도 했다. 또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의사가 너무 야속해서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마치 내게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의사에게는 별것 아닌 작은 일일 수 있지만 환자인 나는 처음 겪는 무섭고 큰 일인데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날은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사는 처음 본 내게 암 덩이가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암이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진맥 한 번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환자는 두려움에 떨며 겁에 질린 채 의사가 하는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모든 의사는 생각 없이 내뱉은 말과 그 밖의 추측성 발언이 정서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감정 폭력> p.200
우리는 일상에서 빈번하게 정신적인 폭력을 당한다. 다만, 이미 사회에 만연해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경향 때문에 정신적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 힘든 것은 은근한 형태로 행해지는 무시와 무관심인데 이러한 빈도가 증가하면 상처가 쌓이지만 어느샌가 당연하게 여겨 내가 아닌 상대에게 감정의 주도권을 주기도 한다.
특별한 사람이 내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해자이다. 부모와 형제 및 자녀 등의 가족, 친구나 회사, 나아가 사회까지 말이다. 나도 이들에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감정 폭력』(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손희주 옮김, 걷는 나무)에서는 감정 폭력의 정의와 사례를 살펴보고 그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다양한 사례로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그중에서 내가 크게 공감한 부분은 '의사가 상처를 줄 땐 어떻게 하죠?'였다.
의사의 언어나 비언어적 행동에 환자는 큰 영향을 받는다. 말 한마디로 생사를 오가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의 말과 더불어 환자의 믿음 여부도 중요하다. 올바른 약을 처방했음에도 환자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의심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노시보 효과, 반대로 효과 없는 약일지라도 긍정적인 믿음으로 병세가 호전되는 플라시보 효과가 그 예이다.
노시보 효과는 환자가 의사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환자와의 대화는 환자가 치료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맞추어 편성되어야만 합니다.
p.198
중환자실 간호사로 십 년 가까이 일한 친구가 업무상 고충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절대 못 할 일인 것 같아 대단하게 느껴진다. 의사들의 고충과 노고도 그 이상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의사는 권위를 가진 전문가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그들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저는 왜 아픈 건가요?! 대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요? 지금 병원에 왜 온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의사에게 신뢰를 잃기도 한다.
병원을 찾을 때도 나와 합이 맞는 의사에게 오랫동안 진료를 받는 것 같다. 얼마 전 병원에 방문했을 때 병원 벽에 걸린 담당의의 사진을 보고 놀랐다. 어느덧 그분이 과의 대표의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사진이 아주 작아 열심히 찾았는데 지금은 맨 앞에 그리고 가장 위에 있었다. 환자의 입장에서 의사를 신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 의사의 고충도 있겠지만 기계적인 반응보다 따뜻한 공감의 말을 해준다면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환자도 빨리 나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 폭력은 이중으로 과소평가 받는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행동이 분명한 감정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적으로 만연하다는 이유로 별일 아닌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로 감정적 폭력을 통한 상처는 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피해가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정신적 폭력으로 받은 괴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라고 강요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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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Photo by Matheus Ferrer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