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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Feb 11. 2021

내 길이었을까?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02

“이미 꽃이 폈구먼-!”

“네??”

“전성기를 이미 겪었다고요~~”

“제가요? 에이.... 설마요~~~^^”


독서모임 그룹원 중 한 분이 오랫동안 명리학을 공부하셨다. 모임이 있던 어느 날, 사주를 봐주신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신년 운세를 보면서 듣지 못한 구체적인 내용을 들려주셔서 깜짝 놀랐다. 내게 전성기가 있었다니... 좋은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많은데 인생의 전성기가 고작 이 것이냐는 생각이 스쳤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그때는 하고 싶은 대로 다했을 것 같은데? 꽃이 아주 활짝 폈어요~"

"그때 나 뭐 했지? 음... 헉?!... 맞아요... 와... 소름... 원하던 거 다 이룬 시기였어요! 정말 행복했는데..."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반년을 방황하던 그때,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친했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학 생활을 하니 자주 만나기 어려웠다.

“나는 임고 포기했어. 이제 뭐 해야 하나 막막해하면서 지내고 있었어~”

“그랬구나... 나는 연구원에서 행정일 하고 있어~”

“뭐? 진짜?”

그녀는 분명 방송국에서 막내작가를 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빨리 취업하면서 꿈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집 근처 연구원에서 일한다니 의외의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도?... 역시... 꿈은 꿈일 뿐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오묘한 감정을 느끼던 중 친구가 말했다.

“지금 우리 옆팀에서 자료 정리 아르바이트 구하고 있는데 한 번 해볼래?”


그렇게 연구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연구에 필요한 업무를 돕는 , 사무보조였다. 기획조정실에 구매한 비품을 가져가서 검수를 받기도 했고,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오탈자 교정도 봤다.

내게 일을 주는 직속 연구원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퇴근 후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할 때 나도 데려가 주었다. 근무 중에도 퇴근 후에도 잘 챙겨주어 나 역시 잘 따랐다. 사회생활은 처음이었으니 언니를 보며 상사는 누구나 착하고 후배도 잘 챙겨주는 줄만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특별한 상사였다는 걸 깨닫고 어찌나 감사하던지!

운 좋게도 옆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와 같은 학교를 다녀서 금방 친해졌다. 가까운 곳에 친구들까지 있으니 일하러 가는 건지 놀러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즐겁게 일했다. 점심시간이나 근무 중에 매점에서 만나거나 퇴근 후에 뭉쳐 다닌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언니와 친구들 덕분에 방황하느라 어두웠던 내가 조금씩 밝아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니들과 함께 찾았던 <무한도전 사진전>



언니의 상사, 즉 내가 일하는 팀의 박사님도 나를 자주 찾으셨다.

"네가 갈 팀 박사님 성격이 진짜 까탈스럽기로 유명해. 그게 좀 걱정인데 너랑 같이 일할 연구원(언니)은 진짜 좋아~ 그래서 괜찮을 거야!"

처음에 친구가  말처럼 박사님과 마주하는  쉽지만은 않았다. 박사님은 복사나 문서 정리 말고도 다양한 일을 시키셨다. 한두  하던 일이 어느새 고정 업무가 되었고 어느덧   연구원들의 일도 했다. 나중에 직속 연구원 언니는 일이 많아서 나를 채용했는데 내가 거의 박사님 비서가 되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연구원에서 일하던 초반에는 박사님 전화가 오면  언니를 찾았는데, 점차 나를 찾는 비중이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님 방으로 내려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박사님~! 찾으셨어요?!”

지금 우리 센터에는 행정 조원이 없잖아~ 근데 루미썬씨 그동안 일하는  보니까 잘하는  같아서 그러는데 행정 조원 해볼 생각 없어?”

놀라운 제안이었다. 행정 조원은  본부나 센터마다  명씩 있었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팀원들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보였다. 나를 연구원에 소개해준 친구가 하던 일이었다.   되면 쉽게 그만두지 않아 티오가 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간절히 기다리는 자리였다.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감사하다, 생각해보겠다'라고 말씀드렸다. 깐깐하시다는 분이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게 신났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인정을 받았으니 얼마나 들떴겠는가?

한편으로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연구원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즐거웠지만,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보람을 느낀 적이 없었다. 종일 바쁘게 일해도 하루가 끝나면 허탈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만 해야 했으니까.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행정 조원을 하면 이런 점은 개선될까 싶어 고민했다. 계약 기간도 안정적으로 연장되고 지금보다 많은 급여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정해진 일만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박사님은 내가 연구원에서 일한 8개월 동안 세 번이나 자리 이동을 제안하셨다. 하지만, 전부 거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뭘 믿고 그렇게 튕겼나 싶다. 지금 같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에! 이 일도 지금까지 엄마에게 잔소리 공격을 듣는 사건 중 하나다.

“네가 그때 연구원에서 계속 일했으면 좋았을 거 아냐!! 더 편하게 일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엄마! 전부 세종시로 이사 가서 나 어차피 안 다녔을 거라고!!”


사실  마음을 흔들던 일은 따로 있었다. 언제까지 보람 없는 하루를 보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면서 다시 구인공고를 챙겨봤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공고 하나!  근처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인턴교사를 구하고 있었다. 국어과도 구하는  확인한  학교에서 학생들과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뛰었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다.  

"너무 감사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오랫동안 다니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박사님의 제안을 거절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나였다. '나 아직 꿈을 접지 못했어.' 원서라도 넣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면접은 또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없다. 떨면서 교무실로 총총총 들어갔던 장면밖에는.


"저 임용고시 포기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떠나질 않아서 결국 인턴 교사 지원했는데요. 3월부터 출근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이번 달까지만 근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니와 박사님은 진심으로 잘됐다고 축하해주었다. 함께 다녔던 친구들 역시 기뻐했다. 내게 좋은 추억만 만들어준 사람들인데 헤어지려니 너무 아쉬웠다. 잘해준 기억밖에 나지 않아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직속 연구원 언니와 옆팀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지낸다. 예전만큼 자주 보지는 못해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감사한 사람들이다.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라고 한다. 하지만, 밝은 에너지가 넘쳐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생각하던 때가 분명 있었다. 연구원에서는 꽃나무를 군데군데 심으며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 필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이별 끝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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