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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Mar 12. 2021

직업이 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04 나는 출판인이다

출판인 양성 과정(국비 지원 무료)

“이것 봐! 여기 직업학교인데 출판 과정 전체를 배울 수 있대.”

“그래서, 이거 배우겠다고?”

“응... 나 책 좋아하잖아~ 배우는 것도 무료래~ 전공 살려서 교재 만드는 회사로 취업하려고!”

“어휴... 정말. 네가 알아서 해!!”


부모님은 내가 학교로 출근하니 다시 임용고시를 치를 줄 아셨나 보다. 책을 만들겠다는 건 기대했던 소식이 아닌 듯 보였다. 딸내미가 오랜 고민 끝에 가져온 결론으로는 무척이나 실망하신 눈치다. 나 역시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우연히 발견한 공고를 보고 마음이 움직일 줄 누가 알았겠나.


막상 진로를 바꾸려니 오랜 기간 품어온 꿈을 버리기 아쉬웠다. 공부의 재미를 배웠던 교육학을 써 보지도 못하고 놓으려니 눈물이 났다. 학원 강사로 뛰어든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학원이 싫었다. 경쟁해야 하고 더욱이 가르치는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아이들과 대화하며 마음으로 소통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학원보다 1:1 소통이 원활한 과외 교사 면접을 봤다. 교사라는 탈을 쓰고 영업까지 해야 하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은 내 고민에 답이 되었다. 아이들이 공부할 교재를 만들어서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보람을 느끼는 내 모습을 그리며 상상했다.

'이거다!'

다시 목표를 세우고 모 직업 대학 출판편집디자인과에 지원했다. 숨 막히는 면접에 가슴이 조여왔다.

“엄마!! 나 합격했대!!”

걱정이 앞섰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설렘이 더 컸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몰라도 미리 걱정하지 말자.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 작년엔 선생님, 지금은 학생

3월 2일, 마음이 살랑인다. 1년 전 오늘은 교사로 출근했단 말이지. 다시 학생이 된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이 났다. 빼곡히 채운 강의실에서 교육과정을 안내받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처럼 대학 졸업 후 진로 고민을 하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설레는 한편으로 내 나이가 가장 많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30명쯤 되는 인원의 중간쯤이었다. 문학창작과나 국어국문학과 전공자가 대부분일 거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 때문인지 관심 분야도 다양했다. 아동, 인문, 문학 등 장르를 넘어 잡지나 신문처럼 단행본이 아닌 매체도 선호했다. 나이도 관심사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책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한마음이었다.

1년 동안 함께 하니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MT, 체육대회, 견학, 축제, 작품발표회, 책 출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단합을 이끌었다. 예비 출판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열정은 갈수록 타올랐다. 수업이 끝나면 자체 야유회, 벚꽃놀이, 책잔치, 국제도서전 등에 참가하며 최선을 다해 놀았다. 입학 전 걱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즐기는 시간이 그저 행복했다.



#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책

만들고 싶은 책이 그려졌다. 임용고시 공부할 때 보던 교재는 너무 밋밋해서 금방 질렸다. 말 그대로 흰 건 종이, 검은 건 글자였다(공부만 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공부한 거 맞아?). 수험서도 예쁘면 공부할 맛이 더 나지 않을까? 계속 보고 싶은 교재라면 얼마나 좋을까? 교재든 단행본이든 궁극적으로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기획부터 편집, 제작, 유통에 이르는 출판 과정을 배웠다.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서 수업을 들을 땐 기대가 컸다. 매킨토시로 편집프로그램을 배우는 재미도 달달했다.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으로 편지지와 시간표를 만들던 그 마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C(청, cyan), M(적, magenta), Y(황, yellow), K(먹, black)라는 네 가지 잉크로 알록달록한 색을 찍어내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 직진하면 '편집디자이너'

‘얘들아 기다려! 열심히 배워서 문제집 예쁘게 만들어 줄게!’

이 생각 하나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과제가 있으면 방과 후에 남거나 주말에도 등교했다. 교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질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멏 개월 공부해 보니 내가 원하던 수업 방향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출판이라고 하면 기획자나 편집자를 떠올리며 원고를 다듬는 일로 생각했다. 어떤 책을 만들지 기획안을 작성하고 저자 섭외 후 목차를 꾸리고 싶었다. 하지만, 수업 중 8할은 편집디자인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내용은 특강 정도에 불과했다.

'아... 여기 편집디자인과였지....'

Quark(쿼크)와 InDesign(인디자인)이라는 편집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80년대로 돌아간 듯한 촌스러운 화면이 매력(?)인 Quark. 주로 신문사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으로 당시(10년 전)만 해도 연혁이 오래된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Adobe에서 InDesign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자리를 빼앗긴 듯 보였다. InDesign은 현란한 자동화 기능을 선보였으니 나 역시 Quark 수업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과연 이걸 배워서 써먹을 데가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다. 여기에 Photoshop과 Illustrator까지 배우며  ‘컴퓨터그래픽운용기능사’와 ‘전자출판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렇게 나는 편집디자이너가 되고 있었다.



# 따끈따끈한 책을 손에 들고

2학기가 지날수록 내 선택을 의심하며 고민이 깊어졌다. 디자인 전공자도 아닌데 과연 편집디자이너로 살아남을지, 편집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건지 말이다. 때마침 대대적인 학과 행사로 책 출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년 동안 배운 내용의 결과물이니 무척 중요했다. 각자 글 한 편을 쓰고 디자인까지 완성하기로 했다.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 줄 사람도 필요했다.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을 한 나를 포함해 편집위원을 구성했다. 교정 교열을 하고 글을 모아 목차를 꾸려나갔다. 디자인 전공자는 레이아웃 구성을 담당했다. 점점 하교가 늦어졌다. 그런데 이상하지. 회의를 마친 후 집에 가려고 교문을 나서는 길이, 그 공기가 왜 상쾌했을까! 아직 책이 나온 것도 아닌데 뿌듯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완성된 책을 손에 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니 흥분되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 먹고사니즘 앞에서

책 출간과 졸업 작품전을 마치니 졸업이 눈앞이었다. 프로젝트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덕에 바로 취업 연계를 받았다. 이게 문제였다.

1년 동안 일을 못 하고 배우러만 다녔으니 경제적 부담이 컸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는 해결되지 않아 부모님께 교통비를 지원받고 있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취업이 간절했다는 뜻. 하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지. 취업 기회를 바로 잡아 감사했지만, 원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아니, 원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 다른 친구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그들보다 3, 4년 정도 늦게 시작한 셈이니 초조한 건 당연하다.

“루미썬! 이 회사 갈래? 말래?”

내가 원하는 회사에 취업하기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결국 교수님이 추천해준 회사로, 동기 중 가장 먼저 취업했다. 친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말이다.

교수님! 저 이제 출판인 되는 거예요?!”





우연히 발견한 공고에 이끌려 책 만드는 세계로 들어왔다. 동기들과는 종종 출판단지에서 마주쳐 길에서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유명 출판사로 이직해서 아직 근무 중인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덕업일치> 매거진은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기로 마음먹었지만, 이 글은 3주가 넘도록 완성하기 어려웠다. 이때가 인상 깊지 않았던 걸까? 이때를 기점으로 직업이 확 바뀌었는데 왜 이리 기억이 흐릿한 걸까?




인쇄기법을 배우며 만든 굿즈
졸업작품전에서 우리 조가 만든 책과 신문
<북소리>  1년 동안 함께한 친구들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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