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07
어떻게 되긴, 1년이나 배운 걸 그냥 버리긴 너무 아깝잖아? 일단 대학 교재라는 녀석을 알아가기로 했다.
선배들이 진행하는 책을 수정했다. 교재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었다. 일반 단행본보다 커서 글밥도 많은 대학 교재가 반갑지는 않았다. 공책만 한 B5나 더 큰 A4 크기가 주를 이루었다(판형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할 예정). 크기가 크니 텍스트는 거의 2단 배열이었다. 한 페이지를 꽉 채워 페이지 수를 적게 만들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 사진이나 삽화도 꼭 있었다. 내용도 딱딱한데 글자만 있으면 누가 보겠는가. 표와 상자까지 넣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용어 정리, 요약, 연습문제 그리고 몇 페이지씩 나열된 참고문헌까지 추가하면 대학 교재 풀버전 완성이다.
대학 교재라고 다 똑같지는 않았다. 분야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하나씩은 있었다.
의학책은 용어가 핵심이다. 전공마다 신용어와 구용어 중 메인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달랐다. 책에 쓰인 용어는 ‘신용어(구용어, 영어)’와 ‘구용어(신용어, 영어)’ 로 정리했는데, 순서가 바뀌어도 비슷해 보여 못 잡고 놓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사진과 그림도 까다롭다.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표현하는 초음파나 방사선 사진은 명암에 따라 병변 부위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도 많아서 보정 작업이 중요했다. 해부학처럼 신체 여기저기를 보여주는 일러스트는 일반 삽화보다 정밀한 작업이 요구됐다.
그에 반해 공학 책은 수식이 많다. 커다란 분수나 루트를 뒤집어씌운 텍스트를 편집하는 게 까다롭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들고, 그걸 문장 사이에 자리 잡을 때도 하나하나 조정해야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시간도 더 걸린다.
화학책은 종종 수많은 공이 겹쳐있는 듯한 분자구조 일러스트 때문에 곤란했다. 용량이 큰 고품질 이미지가 프로그램에 과부하를 걸어 작업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화학식이 많은 것도 한몫한다. 화학식에는 위아래 첨자가 많지 않은가? 첨자도 일일이 스타일을 지정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갔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편집할 때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니 가끔 들어오는 인문사회 교재나 단행본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소설처럼 얌전한 본문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다양한 문자 스타일 감상이 가능하다. 강조하는 내용을 굵게(볼드)하는 건 기본이고, 원서에서 이탤릭체라면 번역서에서는 고딕체를 사용했다. 고딕에 볼드는 그만큼 중요한 거고 밑줄이나 색상을 넣어 강조한다. 영어나 한자 병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스펠링 체크하기도 쉽지 않다.
오탈자는 기본이고, 말이 안 되는 문장은 교정팀에서 윤문 했다. 원서 혹은 원고와 다른 경우, 영문은 같은데 서로 다른 한글로 쓰인 경우, 하시라(책에서 쪽 번호 옆에 쓰여있는 제목)나 책 제목이 내용과 다른 경우, 차례 제목과 페이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디자인이 다른 경우 등 교정 내용은 다양하다. 같은 형식이어야 하는데 각기 달라 전체 통일이 필요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교정사항을 수정하다 보니 점점 교정이 필요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틀린 것을 찾는 습관이 저절로 생기는 거지. 교정자가 체크하지 않아도 오류를 잡아내는 안목도 생겼다. 제목에 쓰인 병기는 전부 본문으로 보내서 깔끔하게 만든다든지, 교정 전에 참고문헌을 스스로 정리하는 여유 같은 것 말이다.
처음에만 어려웠지, 틀린 걸 찾아내려는 본능 때문인지 대학교재와 그걸 다듬는 일에 금방 적응했다. 그렇게 익숙해질 때쯤,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