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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Apr 11. 2021

본문 디자인은 이렇게!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09 디자인이 괴로워


“시안 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차장님의 질문에 목이 탔다.

“아… 그게…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한데... 잘 안 돼요.”

“부담 갖지 말고 하는 데까지 해 봐요~ 그런데, 모레 보내야 하니까 오늘은 컨펌받아야 해! 그래야 수정할 시간이 있겠지?”

“헉… 네…(눈물…)”


일주일 안에 시안 작업을 해야 했다. 벌써 주 중반을 달리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데 눈에 띄는 결과물이 하나도 없으니 초조했다. 번역서라 시안 두 개 중 하나만 창의적으로 만들면 되니 부담이 덜한 게 정상이었지만, 속은 까맣게 탔다. 출판 학교에서 책 디자인도 해봤지만, 이벤트성 실습은 현장에서 도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단행본이 아니지 않은가. 막막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미완성 시안을 보고만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차장님…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는데요. 2번 시안(원서와 다른 시안)은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볼까? 음… 1번 시안은 여기, 저기 수정해주세요. 그리고 2번 시안은 디자인 실장님이 봐주실 거야. 그렇죠 실장님?”

“네?”

실장님이 놀라며 답했다.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리 와서 앉아 봐요!”

펜과 수첩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실장님 옆에 앉았다. 

“흠…..”

“하아… ㅠㅠ.”

말없이 시안 여기저기를 훑어보는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죄인이 된 것마냥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실장님은 현재 시안에서 이 부분 저 부분 수정하며 달라지는 점을 설명해주었다. 사소한 것 하나 바꿨을 뿐인데 정돈되고 있었다. 

“실장님... 시안 잡는 게 너무 어려워요…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두 개나 만들어야 하니까 스트레스도 너무 많이 받고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거의 울먹이며 고백했다. 시안 컨펌 시간이 끔찍이도 싫었다. 새 책을 받을 때면 난이도 걱정보다 ‘또 시안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온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차라리 쫓기는 일정에 허덕이더라도 쌓여있는 교정지를 쳐내는 편이 나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 매주 정해진 시간마다 디자인 수업을 하려고 해요. 신입 사원은 물론이고 기존 직원들도 디자인하면서 어려웠던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체계적으로 공부할 거야. 정해준 교재는 한 번씩 미리 읽어 보고요. 다른 자료도 참고할 거니까 수업 준비해오세요.”

실장님은 편집디자이너를 대상으로 디자인 수업을 제안했다. 보통 디자이너는 본인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동료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편이라고 들었다. 경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색이 뚜렷해서 수정 요청도 반기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만 들어서 그런지 수업 제안은 의외였다. 직원 발전을 위해서 경험을 나누어준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처음으로 디자인이라는 걸 공부했다. 회사에서 대충 알려주는 느낌이 아니라 학원이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처럼 정교한 시간이었다. 출판 학교에서 배운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책을 만들잖아. 그럼 일단 표지를 제외하고 책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뭐가 있지?”

“도비라*가 제일 힘들어요.”

*도비라: 책에서 ‘부’나 ‘장’ 제목을 알리며 디자인한 쪽, 일본어.

“그렇지. 물론 내지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도비라죠.  또?”

“하시라*요. 숫자만 나오는 책도 있지만 디자인 요소 들어가는 책도 많아지더라고요.”

*하시라: 책에서 쪽 번호와 장제목을 표시한 요소, 주로 위나 아래에 위치하고 양쪽에 들어감, 일본어.

“맞아. 요즘 하시라가 예뻐지더라고. 또 뭐가 있을까?”

“그럼 제목도 크죠. 체계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야 하니까요.”

“그렇지. 이게 다 여러분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지? 어렵기도 하고?”

“네~”

“다 맞는 말인데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

“여백이야.”

“헉”

생각도 못 한 답이었다. 사실 여백은 위아래로 너무 붙지 않게 내가 보기 좋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쇄 후 재단할 때 글자가 잘려서는 안 돼. 종이가 밀리면 쪽마다 조금 다르게 재단될 수도 있으니까 절대로 잘리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여백은 남겨야 한다는 거야.”

“아~~”

“여백은 위, 아래, 안쪽, 바깥쪽 여백이 있지? 위/아래 중에서는 어느 쪽 여백을 더 많이 주느냐에 따라 안정감이 달라져. 위가 좁은 경우, 아래가 좁은 경우 둘 다 직접 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안쪽과 바깥쪽은 책 만들 때는 특히 중요해. 왜냐하면 책을 펼쳤을 때도 글자가 다 보여야 하거든. 어떤 책은 꾹꾹 눌러서 쫙 펼쳐야 글자가 보여서 결국 책이 갈라지는 경우도 있잖아.”

“맞아요!!”

“그렇게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겠지? 특히 우리가 만드는 책은 글밥이 상당히 많은 교재잖아. 그러니 바깥쪽보다는 안쪽 여백을 더 많이 줘야 하지.”

“그렇구나…”

“여백과 관련되는 건 텍스트 영역이지. 본문 폭이 중요해. 110mm와 160mm는 숫자만 들어도 차이가 있지? 그럼 폭이 160mm일 때는 110mm일 때보다 한 줄에 몇 글자가 더 들어가겠지?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면 쪽 수는 줄지만, 그만큼 한 번의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 글자 수가 늘어나는 거야. 어때? 피로도도 높아지겠지?”

“아!”

“물론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 책도 있어.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숫자가 크다고, 많이 들어간다고 꼭 좋은 건 아니라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탄밖에 없었다. 여백과 본문은 늘 있으니 디자인 요소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저 화려한 도비라와 컬러, 예쁜 아이콘을 어떻게 늘어놓을지만 고민했으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기본인데 기본을 몰랐으니 어떻게 한들 제대로 되었을까? 

“원고를 보면 다른 원고에 비해 양이 적을 때가 있어. 그럼 다른 책에 비해 두께가 얇아지겠지? 이럴 때는 여백을 조금 더 주거나 본문 폭을 좁혀서 쪽 수를 늘리는 거지. 반면에 텍스트는 많은데 책이 너무 두꺼워도 안 될 때도 있지. 그럼 여백을 줄이고 본문 폭을 늘리는 거지. 이렇게 책에 따라 응용하면 돼. 이해되었나?”

“네, 이해됐어요!”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본문이지. 형태는 방금 설명했고, 본문은 글자잖아. 즉 글자를 디자인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중요해. 기본적으로 명조와 고딕이 다른 건 알고 있지?”

“네~”

“보통 책 보면 본문이 명조체야? 고딕체야?”

“명조체요!”

“왜 그럴까?”

“흠…?”

“간단해. 고딕체보다 명조체가 가독성이 좋으니까. 직선으로 쭉 뻗은 글자가 다닥다닥 붙어서 300쪽이 넘는 책 본문으로 쓰여있다고 생각해봐. 잘 읽힐까? 생각보다 읽기 피곤할 거야. 왜 쉽게 대학에서 리포트 쓸 때, 예쁜 서체로 본문 쓰는 애들 많지 않았어?”

“맞아 맞아.”

“그렇게 쓴 게 읽기 편했어? 아니면 한글에서 바탕체 같은 기본 명조체가 읽기 편했어? 예쁜 서체를 제목으로 포인트만 주었다면 더 눈에 띄었을 거라는 거지. 책을 만들 때는 ‘가독성’이 좋아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그럼 우리가 만드는 책에 응용하면 어떨까? 우리는 주로 무슨 책을 만들지?”

“교재? 의학? 공학?”

“그렇지. 전문적인 학술 서적이니까 용어가 많이 나오잖아. 용어가 많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뭐가 많이 나오지? 영어든 한자든 괄호로 묶은 병기가 많지. 근데 괄호가 너무 많으면 본문을 읽는 데 흐름이 끊기겠지? 그래서 괄호는 본문보다 작게 해. 괄호 없는 병기도 사이즈를 줄이고 서체나 색상에 변화를 주기도 해. 그럼 본문을 더 부드럽게 읽을 수 있다는 거지.”

“아… 실장님이 디자인하신 책에서 봤어요!”

“맞아. 나도 잘 사용하는 방법이야. 그리고 중요한 건, 여러분이 잡은 시안에서는 본문에 한글 서체 하나만 쓰였거든. 그럼 영어와 숫자도 한글용 서체로 쓰인 거야. 그런데 영어와 한글은 모양부터 달라. 즉 영어/숫자는 영어용 서체를 사용해야 훨씬 보기 좋아. 지금은 차이를 못 느껴도 아마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이왕 글자를 연습해 본다면 자간과 장평도 조절해봐. 장평은 한 글자의 폭을 말하는데 기본은 100인데 이걸 95로 할 때와 105로 할 때가 달라. 자간도 서체에 따라 더 벙벙해 보일 때도 있고 좁아 보일 때도 있거든. 시안 잡으면서 연습해 보고 내 눈에 가장 보기 좋은 설정을 찾아내는 게 중요해. ”

“글자만으로도 디자인이 된다니…”

"제목 디자인할 때도 말이지. 상위 제목일수록 크고 화려하지. 크기, 서체, 컬러, 아이콘 등으로 상위 제목을 꾸며주고 하위로 갈수록 본문과 비슷하게 만드는 게 좋아."

"아-"

"마지막으로 디자인할 때는 통일감이 필요해. 여러분 시안 보면 이것저것 많이 써야 예뻐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아. 예를 들어,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을 사용한 것과 이 중에서 주황과 초록만 사용한 게 있다고 해봐. 그럼 많은 색을 사용한 게 무조건 예쁘고 잘 된 게 아니라는 거야. 오히려 두 가지 색으로만 표현해서 통일감을 준다면 그게 훨씬 좋은 디자인이 될 수도 있어. 또 하시라나 도비라에 동그란 아이콘을 사용했는데 본문 제목에는 삼각형이 들어가 있고, 그림 제목에는 사각형을 달아뒀다고 해봐. 그것보다는 도비라에서 사용한 동그란 모양으로만 통일감을 주면 더 깔끔할 수도 있다는 거지. 서체도 똑같겠지? 예쁜 서체는 나중에 찾고 처음에는 명조랑 고딕으로만 잡아봐. 포인트는 한두 개만 있으면 돼. 자꾸 이것저것 새로운 걸 넣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사용한 거로 비슷한 분위기를 주는 연습을 해봐. 그게 먼저인 것 같다!”

“네~~~!”

“도비라나 이미지 크기 잡는 법 같은 건 다음 시간에 설명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설명을 받아 적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그제야 멈추었다. 들을수록 재미있었다. 

이론을 공부하고 실장님 자리에서 예제를 직접 보며 이해했다. 자리로 돌아가서 각자 실습했고 그 내용은 다음 시안을 작업할 때 적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까마득한 느낌은 점차 사라졌다. 시안 컨펌을 받으러 갈 때마다 듣는 ‘지난번보다 좋아졌네?’라는 칭찬이 좋았다. 스트레스받았던 과정을 보상해주는 듯 달콤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을까. 여느 날처럼 시안 컨펌을 받던 중이었다. 실장님이 내게 말했다.

“루미썬은 너무 어중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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