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10 누가 이기나 해보자
*** 동명의 브런치북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루미썬은 너무 어중간해!”
디자인 실장님은 다정한 분이셨다. 시안을 컨펌받으러 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다가 왔는지 아니까, 모진 말보다는 칭찬과 격려로 이끌어주었다. 나도 그런 실장님이 감사해 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나 두 번째 시안이 잘 풀리지 않아 완성하지 못한 채 가져갔다. 개인 지도를 받으며 실장님에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곧 실장님이 내게 말했다.
“루미썬은 너무 어중간해.”
“......”
실장님이 이렇게 솔직한 말을 던진 건 처음이라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어중간하다고요?”
“그래. 매번 나한테 와서 디자인하기 싫다고 말하잖아. 다른 일 하고 싶다고.”
“아……”
상사에게 일 하기 싫다고 말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시안을 작업할 때는 출근하기 싫어지는 나날이 이어지니 나도 모르게 실장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즉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배우러 가서 ‘나 디자인 하기 싫소! ’ 하며 배 째라고 말한 셈이었다. 듣고 보니 죄송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주는 거야. 루미썬은 디자인을 못 하지는 않아. 전체적으로 보는 눈이 있어. 근데 잘하지도 않아.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을 잘 못 해.”
“저도 알아요. 그래서 계속 하기 싫다는 마음이 튀어나왔나 봐요.”
“그래서 이렇게 배우면서 다듬으면 나아질 것 같기는 해. 아니 그동안 수업 들으면서도 나아졌잖아. 근데 본인이 하고 싶어야지.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어?”
“맞아요…. 일이 싫은 건 아니에요.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편집할 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해요. 문제는 시안 잡고 디자인할 때인 거죠. 실장님도 느끼셨겠지만……”
사실 그랬다. 출판학교에 다니던 중반부터 글이 아닌 디자인 위주의 교육과정인 걸 알고 이미 실망했었다. 그런데 취업도 원하는 분야가 아니었으니 무엇 하나 즐거울 게 없었다. ‘조금 참으면 경력이 쌓이겠지, 놀면 뭐 해, 배우는 게 있겠지.’라고 합리화한 마음은 해소되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화 한 번 안 내고 도와준 실장님에게 더는 투정 부릴 수 없었다. 끔찍한 평가에 상처받았지만, 그게 내 실력이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 않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내가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던가? 미술 시간을 싫어할 정도로 손재주가 없었다. 다만, 포토샵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의 편지지와 이름표 만드는 걸 즐겼다. 딱 거기까지였다. 몇 번 실습한다고 마법처럼 없던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고, 못 하겠다고 말하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은 일이었다.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는 생각만 더해져 나를 괴롭힐뿐이었다.
이 사건은 내가 시안 작업에 정면으로 맞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도 못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하게 된 시작이었다. 그렇게 이 회사에서 2년을 더 있었고, 디자인은 진짜 그만할 거라며 퇴사한 후에도 3년 이상의 시간을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다. 그 6년 동안 만든 책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