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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Mar 23. 2023

나만의 생의 레시피

할머니의 팡도르


저는 낙화하는 꽃잎이 아름다운 봄도 좋고,

싱그러움과 생의 기운이 넘치는 여름도 좋아합니다.

빨갛게 물든 뒤 어느새 쓸쓸하게 떨어지는 단풍잎은 

곧 다시 싹을 피울 것이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 같아

가을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꽃 송이를 바라보며

사케 한 잔 홀짝인 뒤

따뜻한방석 위에 앉아

여유 부릴 수 있는 겨울 입니다.


몇번의 눈이 펑펑 내린 올 겨울은

창밖으로 소복소복 쌓이는 눈이

마치 겹겹이 쌓이는 시간의 지층과 같아

마음의 둑이 훅~! 무너져 내립니다.


겨울의 날들 중에서도

예기치 못한 눈이 쏟아지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창 밖으로 펼쳐진 뜻밖의 고요속에 바뀐

풍경 때문입니다.


고요하면서 세상을 찬란하게 하는 눈은

사납게 들이치는 비 보다 힘이 있기에

비와 같은 요란스러운 삶이 아닌,

고요하면서 힘이있는 눈과 같은 삶을 살았으면

참 좋겠다,

소복소복 쌓이는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생각하며

따스한 그림책 첫 장을 펼쳐봅니다.




강으로 둘러싸인 외딴 집에 혼자 살며

매일 고단한 날들을 조용히 살아가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는 죽음 조차 나를 잊었다며

무심히 중얼거리지만

죽음의 사신은 할머니를 잊지 않고 찾아옵니다.


나와 함께 가자는 죽음의 사신에게

특별한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고 있던 할머니는  

“잠깐이면 돼요.

그러지 말고 간이나 좀 봐 줘요." 라고 말하며

사신의 입에 손에 든 주걱을 속 넣습니다.


그러자 사신은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흠뻑 빠져

할머니를 데려갈 날을 미루게 되고,

할머니의 특별한 빵이 숙성되고

완성이 될 때까지 밀당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사신의 이 사이에서

달콤한 것이 빠져나왔습니다.

바로 건포도 조각이었어요.


사신은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어요.

건포도 조각 속에는

가을날 포도밭의 정취가 가득했어요.


쏟아지는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 

달콤하게 익어가는 포도 향기에 사신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빵 속에는 온갖 풍미가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생의 맛이었어요.


죽음의 사신은 번번히 계획이 틀어집니다.

바로 할머니의 특별한 '생의 맛' 때문!


죽음의 사신과 할머니의 생의 맛을 주는 빵은

공존하는 것 입니다.

산다는 건 하루하루 죽어가는 일과 같음을,

그렇기에 우리의 삶의 끝에 죽음이 있고

삶의 곁에도 죽음이 있다는 것 또한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 문턱까지 와 있을지 모를

안녕 없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

언제일지 모를 죽음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말들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지금 이 순간과의 헤어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할머니가 만든 다채로운 생의 맛을 주는 빵이

사신의 입을 통과하는 것을 보면

삶과 죽음은 이렇듯

우리의 삶 속에서 공존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책 속 '생의 맛' 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당깁니다. 그리고 저는 묻습니다.


내가  두발을 딛고 사는 이 땅,

지금, 바로 여기 에서 나는

어떤 생의 맛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의 사신이 찾아온다면

어떤 이유를 대며 나의 삶을 유예 할 것 인가..


사신이 허락한다면 하루 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길게 드리우는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앉아

그동안 살아온 흔적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지난 사진첩을 들춰보겠습니다.


그때 서로 다르게 남은 기억과 추억 사이를 오가며

행복했다고, 즐거웠다고…

미처 그때 꺼내지 못한 감정들을 꺼내 말 하겠습니다.


둘째날 다시 사신이 찾아와

또 하루의 유예 시간을 준다면

사랑하는 친구들, 지인들을

갈매기가 허공에 시간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잘 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는 테라스에 초대해

그동안 고마웠다고 식사를 대접 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내가 정말 행복했다고 한 사람 한 사람 나에게 준 행복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꼭 끌어안으며 하겠습니다.


셋째날 다시 찾아와 다시 한번 또 하루의 유예 시간을 준다면....


세상에 남아있을 아들에게 편지를 남기겠습니다.

그 편지에는 진정한 내 사람을 알아보는 법,

좋은 취향를 가지는 법,

살아가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지혜롭게 파도를 넘는 법,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 등에 대해

생의 레시피를 남기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날을 알차게 보낸 후 미소지으며 미련없이 죽음의 사신을 따라 나서겠습니다.


할머니께서 남기신 마지막 찰다 속에 숨겨진 특별한 빵의 레시피는 아이들이 발견하여 레시피의 삶을 살아내고, 그렇게 이어지고 또 다른 서사가 생겨 계속되는 것 처럼 남은 생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생의 맛을 느끼게 해준 것은 무엇인지, 삶의 의미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겠습니다.


어찌보면 답을 알 것도 같습니다.

크고 대단한 것도 아니고,

거창하고 값비싼 것도 아니라는 걸.


그저 지금 곧, 여기에서 

충만하게 사랑하고 사랑 받았던  책갈피와 같은 날들을 열심히 뒤로 하며 살아가는 것 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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