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레터 <채운다는 것>
그림책 <채운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올해 저의 최애 그림책이 될 것 같아요 :) 그림책 내용을 소개하자면 찻잔은 자신의 맡은 역할을 열심히 수련 한 뒤 어느 할머니 댁에 들어가 홍차를 담아내는 역할을 부지런히 수행합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어떤 계기로 찻잔은 숲 속에 버려져요.
더 이상 홍차를 담지 못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찻잔은 괴롭고 힘든 날을 보내지만 밤하늘의 달빛을 찻잔에 담아내면서 수동적이었던 삶이 능동적인 삶으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시기마다 혼란(위기)과 선택을 반복하며 나만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 가요. 그리고 그 혼란의 시기에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와의미 재구성(mean-making)을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됩니다. 살다 보면 종종 계획하지 않은 ‘삶의 전환점' 앞에 서게 돼요.
예상치 못한 이별, 상실, 퇴사, 질병, 혹은 아주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 그 순간은 낯설고 막막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런 시기가 삶의 결을 바꾼 진짜 시작 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정해져있는 급여,졸업했으니 취업을, 취업했으니 결혼을, 결혼했으니 출산을...그리고 가정을 위해 남편의 직장인으로서 애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힘쓰고.. 정해진 루트, 해야만 하는 일들, 그리고 해내야 하는 것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따박따박 채우는 삶을 사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 일. 귀찮지만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쌓여가는 것들 안에는 늘 군더더기가 끼는 법! 그러고 보니 비우지 못하고
계속 채우기만 하는 정치인들도 몇몇 떠올라요.
채우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비우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비우는 경험도 단숨에 이뤄지지 않아요. 아프니까 보이고, 퇴직할 때가 되니까 보이고, 상실하니 소중함이 보이고..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해. 그래야 새로운 걸 채울 수 있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대사처럼 비워냄은 채움의 필수이겠습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와요.
찻잔이 홍차를 비워내고 밤하늘 달빛을 담아낸 것처럼저도 지금 무엇을 비워내고 무엇을 담을 준비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당신께 묻습니다.
"당신의 찻 잔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그리고 무엇을 비워낼 준비를 하고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