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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내리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

그림책 레터 <너무 울지 말아라>

by 여울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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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늘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구나.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지.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빠는 휴가 때 집에 오시면 일하는 딸을 위해 첫 손자였던 대희를 돌봐주셨습니다.

어느날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제가 퇴근하고 귀가하는 길에 저 멀리서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두 눈은 반쯤 감긴 채 걸어오고 있는 아들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친정 아빠는 재미있으셨던지 연신 웃어대며 저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산에 다녀왔는데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잘도 걸어~ 허허허.. 그 모습이 제 눈에도 얼마나 귀엽던지요. 오늘 밤은 일찍 푹 재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철없는 딸은 내일도 손주 데리고 산에 다녀오시라고 주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엄마! 할아버지랑 산에서 먹는 컵라면이 아주 일품이야! " 라고 말하는데 "응? 대희 컵라면 먹어봤어? "라고 물으니 "응! 먹어봤지! 할아버지랑 산에 가면 꼭 먹는다고." 아니, 이게 웬일.


컵라면은 물론이요, 과자, 인스턴트식품은 최대한 먹이지 않고 아이를 유난스럽게 키우고 있는 저였기에 다섯 살 아이에게 컵라면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이었습니다. 저는 친정 아빠에게 "아빠! 대희랑 컵라면 먹었어?"라고 묻자 "먹었지! 아주 잘 먹던데" 라며 말씀하시던 아빠. "아이 참.. 벌써부터 컵라면을 주면 어떡해." 라고 말하자 "뭐 어때. 가끔 먹는 건데." 라며 허허허~ 웃으셨습니다. 다음부터는 컵라면 먹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알았어, 알았어 연신 대답만 하시고는 다음 날 손자에게 “엄마한테는 비밀이야!”라고 약속한 뒤 산에 올라가 또 컵라면을 호로록~ 맛나게 먹었다며 아들이 저에게 신이 나 이야기합니다. 저는 또 “아빠! 대희 컵라면 먹이지 말라니깐”이라고 얘기하자 손자에게 “장대희! 너, 엄마한테 얘기했어? 할아버지가 비밀이라고 했잖아”라고 말씀하시더니 허허허..


아마 손자와 함께 딸 몰래 먹은 컵라면의 맛은 더 짜릿했을 것입니다.

손자와 공범이 되어 잔소리하며 유난 떠는 딸에게 복수하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저희 삼 남매뿐 아니라 손자와도 많은 추억을 남기고 항해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손자의 나이는 9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제 함께 산에 올라가 컵라면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유치원 하원 버스에서 폴짝 뛰어내리면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와 아파트 정문까지 함께 했던 달리기를 앞으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몰랐을 것입니다.


이 그림책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남기는 편지글입니다.

파스텔톤의 그림이 인화해 액자에 넣어둔 오래된 사진이라고 생각하니 이 그림과 이 시간, 오늘 사이에 놓은 나날들이 한꺼번에 압축되어 느껴집니다.


그림책 속 아이는 비가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본인을 늘 데리러 나오셨던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당연히 오실 줄 알고 기다렸던 할아버지 대신 엄마가 우산을 들고 나타나 할아버지와 함께 걷던 길을 이제는 엄마와 함께 걷습니다.


강가에서 우리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지.

들판에는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었어.

너는 모자를 벗어 고추잠자리를 잡았지, 처음으로.

뒤돌아보며 자랑스럽게 웃었어.

하얀 이를 보이며.


어느 날이었습니다.

친정에 대희를 맡겨놓은 후 외출 후 돌아와 보니 아빠가 수많은 탁구공에 숫자를 써넣으신 후 구멍 뚫은 상자에 모두 넣고 계셨습니다. “아빠! 뭐 해?”라고 물었더니 기다려보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셨는지 손자를 부르신 후 “대희야! 상자 구멍에 손 넣고 공 하나씩 뽑아서 큰 소리로 숫자 읽어 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희는 영문을 모른 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주 재미있겠다는 표정과 함께 박스에 손을 넣습니다. 그런 뒤 “9!, 15!, 37!” 따위의 숫자를 큰 소리로 읽자 할아버지는 로또 종이에 손자가 부르는 숫자 대로 색칠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자는 신이 났고, 할아버지는 숫자를 아주 잘 읽는다며 껄껄 웃으시더니 로또 종이에 손자가 불러주는 숫자에 색칠을 하셨습니다. 저는 “와, 로또 숫자 한번 진짜 창의적으로 뽑는다” 라며 함께 킬킬거렸습니다.


그림책 속 손자와 할아버지가 강으로 들로 다니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던 것처럼 이제 열여섯이 된 손자는 아직도 그때의 추억을 잊지 않고 가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렸을때 할아버지가 나보고 탁구공 뽑으라고 하면서 로또 숫자 칠했지, 나랑 버스타고 광화문 광장에 가서 팽이도 사주고 지하철에서 야광 장난감도 사주셨지. 라며..


그날을 돌아보니 일상의 나날들 속 책갈피 같은 날이었고 깊은 밤 내린 도둑눈과 같은 반짝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놀이 삼아 뽑은 탁구공들이 그림책 속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잡은 고추잠자리였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에 올라 바람소리, 물결 소리에 땀 식히며 엄마 몰래 컵라면을 먹으며 짜릿한 웃음과 함께 하얀 이를 크게 드러내며 통쾌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잊어도 좋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겠지만.

세월이 가면 저절로 잊히겠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거니까.


여느 때와 같이 평온했던 이른 아침이었고 해가 쨍한 여름날 이른 아침 오전 5시쯤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새벽에 쓰러지셨고 지금 의식이 없으시다고. 항해 중이셔서 육지에 닿기까지 시간이 걸려 헬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부산대 병원과 연결해 응급처치를 하였으나 의식을 잃으셨다는 것,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너무 무서워 직접 통화하기 힘드니 딸인 저보고 대신하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빠의 상황은 저에게 전달되었고 제 삶은 불행의 파도 속에서 두려움이란 파도에 압도당하여 멈춰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중국과 이탈리아에 있던 동생들에게 전화를 했고, 함께 오열을 했고, 슬픔과 원망의 눈물, 그리움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손수건이 매일매일 흥건 했습니다. 해외에서 시신을 모셔오기까지 한 달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월의 힘이 대단해 모든 것을 잊은 듯 바삐 살다가도 스치는 바람과 저 멀리 구름에서 문득문득 그리움에 밀려 생각날 때면 눈물과 함께 사무치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그랬던가요. 사무치는 마음은 커다란 고통과 함께 온다고.


저는 평생 흘릴 눈물은 그때 다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준비되어 있는 죽음도 힘든데 바로 어제까지 카톡과 문자를 주고받던 아빠가 훌쩍 떠나가버렸음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 계시던 아빠가 오늘부터 사라지셨음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산다는 건 하루하루 죽어가는 일과 같음을, 우리의 삶은 언제일지 모를 죽음 앞에서 매 순간 헤어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그림책 속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겠지만 잊어도 좋고 세월이 가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잊힐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살면서 지나가지 않고 머물러만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하고 잊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또 힘껏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이들의 의무이자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그런 날을 지나며 너는 어른이 되겠지.

애인을 만나고 아이가 태어나고

손자가 생기겠지.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들도 있다. 그러나 손자를 익애 하지 않는 할아버지는 없다” 빅토르 위고의 말은 참으로 정직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give and take 라면 손자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조건 없는 무한 사랑의 느낌이랄까요. 제 아들은 밤잠이 들 때면 손자 옆에 누워 옛이야기 들려주며 함께 달리기 하고, 눈이 오면 눈싸움했던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파도와 같은 여러 날들을 통과해 가며 살다 보면 어른이 되어 애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손자가 생길 것입니다. 그날이 온다면 나의 아들도 온몸과 온 마음에 할아버지로부터 내리내리 받은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 흘러 이어져 내려가기를 바라봅니다.


죽은 사람은 누구나 산 사람들의 행복을 바란단다.

행복하기만을.


"나는 할아버지가 되고 아내는 할머니가 되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때가 되면 할아버지인 우리들은 늙은 나뭇잎들이 땅 위에 눕듯이 사라지고 우리들의 아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정적인 장면에서 일단 끝을 맺고 계속을 알려주는 통속소설의 끝부분처럼 되풀이되고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고 최인호 <나의 딸의 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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