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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꽃 Oct 24. 2024

너와 나의 연결고리

채끝 스테이크

식사하셨어요? 한국인의 대표적인 인사말. 정말로는 상대가 밥을 먹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지만 안부를 묻는 말이다.


이런 가벼운 밥 한 끼가 사춘기 호르몬으로 텝 댄스를 나부끼는 아들과의 관계를 꾸역꾸역 연결하는 소중한 고리가 되어줄 준 몰랐다.  

   


“아씨, 또 졌어”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우리 집은 탑층이어서 오픈된 계단으로 이어진 복층이 있다. 애초에 이 복층은 가족이 모여 함께 놀이를 위한 공간으로 꾸미고자 의도했으나 결국 지금은 아들의 게임방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복층 덕에 아들이 PC방을 가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근래 나는 그 앞에 문을 달아버리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오늘도 게임을 하며 내지르는 아들의 방언이 여과 없이 내 귀에 꽂힌다. 시원시원 뻗어나가는 목청을 타고나지 못한 것에 대한 발악인지 아들은 득음이라도 할 것처럼 게임할 때는 소리를 힘껏 잘도 내지른다.

육두문자와 오두문자 사이를 줄타기하는 아들의 게임방언이 연달아 들려오면 내 가슴은 조마조마해지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다를 반복하며 높낮이 조절 없는 널뛰기를 한다. 아들이 게임하는 동안 발산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불안에 닿아 또 다른 부정적 감정의 파동을 일으킨다.


쿵쾅쿵쾅!

계단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울림을 이끌고 녀석이 내려온다. 계단이 안 부서진 게 다행인 걸까? 차라리 계단이 부서져 복층으로 올라갈 길이 없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저 놈이 2층으로 다시 올라갈 수 없었으면.

그렇다고 안 올라갈 놈이 아닌 걸 알고 있다.  사다리라도 구해서 올라갈 놈이다. 씩씩대는 엄마를 뒤로하고 녀석은 더 신이 난다는 듯 키득거리며 2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 뒤뚱거리는 뒤태가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자 나의 숨은 거칠어만 진다.


내리진 게임에 아들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모양새다. 거친 발걸음으로 냉장고를 향해 가더니 냉수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들이켠다. 냉장고에 붙은 저녁메뉴판을 스캔하던 녀석은 딴 메뉴는 없냐고 퉁퉁거린다.

난 글쎄.. 라고 흘려 대답한다.

평소의 나라면 먹고 싶은 거 있냐, 다른 걸로 해줄까라고 살갑게 되묻겠지만 이미 끓어오른 감정으로 더 묻고 싶지 않다.


내 감정의 그릇이 찰랑찰랑 거린다.


엄마의 띠꺼운 반응에 촉이 선 아들은 나의 곁을 맴돌며 방금 전의 게임 속 전투에서 패배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다.

애미가 말 걸 때는 겨우 대답만 하는 녀석이 애미의 기분 살피느라 현시점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주제로 아무 말 대잔치 중이다. 게임에서 겨우 얻어 낸 골드레벨이었는데 연속 패배로 실버레벨로 강등되었단다. 자신의 레벨 다운의 속상함과 팀원들의 불협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다. 다시 골드레벨로 가기 위해 더 열심히 게임을 하겠다고 궁금하지도 않은 포부까지 밝힌다.


“골드레벨이건 실버레벨이건 이렇게 게임하다가는 네 인생이 브론즈레벨도 안 되겠다”


촤르르.. 내 감정 그릇이 넘치고 말았다.


아들 눈빛이 쎄하게 변한다. 아뿔싸.. 사춘기 아들과의 공존을 위해 혀를 깨물고 살겠다 다짐했건만 혀를 깨물고 있던 턱 근육의 힘이 풀려버렸다. 화가 나서인지 억울해서인지 아님 슬퍼서인지 모를 빨개진 눈을 감추며 2층으로 다시 올라가 버리는 녀석..

냉랭함이 남은 거실에서 나는 몹쓸 입을 쥐어박는다. 그랬어? 그랬구나. 그런 교과서적인 말만 늘어놓았어도 반은 먹고 갈 대화였다. 뱉은 말을 주워 담지도 못하고 빙글빙글 계단 밑을 맴돌다 주방으로 향한다.

비장의 무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나의 비밀병기들이 숨겨져 있다.

사춘기 그 언저리에 해당하는 어느 시점부터 아들의 식욕은 까칠함과 함께 급상승했고 자타공인 육식러버로 본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새겼다. 그런 아들을 둔 덕에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고기를 주섬주섬 쟁여와 녀석과의 관계가 아슬아슬히 천당과 지옥을 오갈 때면 휘리릭 그 비밀병기를 꺼내 사용하곤 한다.


어떤 걸 쓸까. 냉장고를 신중히 들여 다 본다.

홈더하기에서 사 온 두툼한 스테이크용 고깃덩이가 눈에 띈다. 투뿔도 울고 갈 원뿔 채끝이다. 큼지막하고 빨간색으로 쓰인 SALE이란 글자에 홀려 샀던 것이지만 고민 없이 집어 온 나를 칭찬하는 순간이다.

자신감 가득 찬 손길로 채끝을 꺼내 찬 기운을 사락 날리고  올리브유를 앞뒤로 발라 소금, 후추 뿌려 풀코스 마사지 해준다. 통 5중 스텐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궈 치익치익 영롱한 소리 울릴 기막힌 타이밍에 고기를 올리자.  앞뒤 노릇노릇 우아한 브라운 빛깔로 탐스럽게 구워진 내 채끝. 프랑스산 고오급 버터 한 조각 올려주는 것은 필수 옵션이다. 


곁들일 채소는 오늘만큼은 퇴장! 채소를 두고 우격다짐할 상황이 아니다. 이겨놓고 싸우라는 손자병법의 문구를 떠올리며 질 것이 뻔한 채소카드는 고이 냉장고 서랍 칸에 모셔두고 만지지도 말기.


오롯이 고기, 그 하나에 승부를 건다.


고소한 고기냄새가 집 안 가득 넘실거린다.

비염으로 두 콧구멍이 막힌 날이 뚫린 날보다 더 많은 아들은 음식 냄새 하나는 기똥차게 맡아 음식 알아채는 것에 있어서는 고수다. 그 재주가 신통방통하여 아들 몰래 무엇도 먹을 수 없는 우리 가족이다.

치명적인 스테이크 내음은  나풀나풀  날아올라 2층으로 유혹의 손길을 보내었고 아들은 스르르 주방으로 내려와 식탁에 자리 잡고 앉는다. 나는 별말 없이 힐긋 녀석을 본 뒤 아끼고 또 아껴쓰는 나의 예쁜 접시를 꺼낸다.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곁을 맴돌았던 녀석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쪼잔한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스테이크 조각과 함께 소복 담아낸다.


엄마, 오늘 스테이크 맛있다.


비밀병기가 제 역할을 해냈다.

그 한 마디로 우린 다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춘기와 사십춘기의 알콩달콩한 모자지간이 된다.


오늘의 메뉴, 역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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