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까지 D-15hrs
두려운 마음 가득 안고 브뤼셀 자벤텀 공항에 발을 들인 게 1월 31일이다. 시간은 매 순간 느리게 흘렀지만 정신 차려보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어 놨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부활절 방학, 기말고사, 2주간의 종강 후 여행이 드디어 끝나간다. 어떤 날은 내가 유럽에서 산지 벌써 한달이 지났다며 신기해했고, 어떤 날은 출국일이 한달이나 남았다며 괴로워했다. 내 교환학생 생활은 낭만보다는 투쟁의 인상이 더 강하다. 낯선 도시 안에서 자리잡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 실제로 누군가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운 적은 없지만 항시 그런 마음으로 '버텨왔다'.
기말고사 공부 시작 전 마지막 여유라는 느낌으로 일주일 동안 스위스 여행을 떠났다.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 앉아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며 여유롭게 노닐고 있던 오리와 백조들을 보고 있었다. 당시 듣고 있었던 노래는 페퍼톤스의 <긴 여행의 끝>.
외로웠던, 아득했던, 머나먼 여행의 날들
기나긴 날 그 캄캄한 밤 난 언제나 너를 떠올렸어
나의 '너'를 떠올리며 순간 울컥했던 것도 같다. 그 다음 이어지는 가사는 '고마웠던 소중했던 다시 만날 거란 약속 들려줄게 내 낡은 배낭 가득히 담아온 긴 이야기'였거든.
이토록 여행자의 마음을 잘 담은 가사가 어디 있겠냐며 혼자 감동하고 있었다. 일주일 짜리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도 이렇게 울컥하고 감격스러운데, 반 년간의 유럽살이를 마치고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때는 얼마나 벅차오를까?
출국까지 약 열다섯 시간 남은, 정말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지금 아무 감흥이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나 지금 뭔가 느껴야 하나? 생각 정리라도 해야 하나? 오늘 가장 감동이었던 건 <미스 함무라비> 마지막 화였다. 핸드폰 게임을 꽤 오래 붙잡고 있다가, 면세점에서 사야 하는 목록과 가격을 계산하고 내가 즈워티를 너무 많이 환전한 건 아닌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봐도 봐도 불안한 항공기 E티켓을 또 한 번 확인하고, 수하물 정보도 다시 읽었다. 움직이기 싫어 여섯 시간 가량을 뒹굴거리다가 오후 세시에야 밖에 나가 점심을 먹었다. 그뿐이다.
유럽이 너무 좋아 돌아가는 게 아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국 땅을 밟고 싶어 미칠 정도도 아니다. 그냥 예정된 수순을 밟는 듯, 장기 여행자가 선택한 마지막 여행지가 한국 땅인 듯 덤덤하게 캐리어를 점검하고 내일 할 일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아쉬울 때 돌아간다면 그 여행이 부족했다는 의미겠지. 반대로 한국에 얼른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면 나는 앞으로 유럽 땅을 다시 밟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아쉽지도 질리지도 않은 마음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충분히 잘 즐겼다. 그렇기에 언젠가 다시 만날 여지를 활짝 열어놓고 돌아오는 기분이다.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떠난다.
나는 낭만 가득한 여행자로 매 순간에 감탄하며 살지 않았다. 적극적인 교환학생이었는지 평가받는다면 나는 낙제점을 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말하기엔 여기저기 빈틈 많고 부족한 부분 투성이였던 반년 간의 유럽 살이였다. 하지만 매 순간 나답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지난 날을 후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는다. 모든 게 괜찮은 기분이다.그러니 아무 감흥 없는 여행 마지막 날이어도 좋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서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따분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여행을 하며 진정한 나를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이 나를 성장시켰는지는 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알아챌 것 같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을 왜 해야 하는지, 여행의 좋은 점이 뭔지 계속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근데 그게 뭐 대수인가 싶다.
세상에 이런 밍밍한 여행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