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게 두려워서

평범한 실패담 3

by 에이안

토익을 봐버렸다.

모든 근심 걱정 고민은 토익 시험을 치고 나서 생각하자며 신나게 놀아제꼈는데

놀 명분이 사라졌다.


점심에는 같은 처지인 친구를 만났다.

그 역시 본격적인 재취준에 시동을 거는 게 싫어 차일피일 핑계 대며 미루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동지의식이 생겼다.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일 진짜 오랜만이다.


유독,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2019년이었다.

집 밖을 나가기 힘들어 수업에 결석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의 물을 트는 게 힘들어 두어 달을 방치해두기도 했다. 몸을 움직이려면 오래된 응원을 끌어 모아 수많은 결심을 해야 했던 나날이었다. 별 거 아니었다. 나도 알고 있었고. 그래도 못하겠다고 느끼곤 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의 체력이 붙은 것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움직여보고 있다. '정말 이 정도로만 해도 괜찮겠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미하게, 작고 오래갈 수 있게.


원래 계획은 2019년이 가기 전까지 모 프로젝트의 텍스트 작업을 마치는 일이었다. 진짜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었다. 12월 25일에 절반을 끝냈고, 나머지 절반만 일주일 내로 해내면 되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1월은 일주일이 더 지났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끝냈다고요!!!!!!!! 내가 10일도 넘게 미루던 걸 오늘 드디어 해냈다고!!!!!!! 물론 교정 작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계속 같은 텍스트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겠지만!!!! 일단 다른 사람이 작업 들어갈 수 있을 수준의 교정은 다 보았다구요!!!!! 이것만으로도 난 오늘 할 일을 다 했다!!!!!!!!!


일을 최대한으로 미루다가 결국 시작하지 못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2. 무조건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3. 집에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4. 작업을 하려면 노동요가 필요하니까 유튜브를 튼다.

5.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멍 때린다. 메신저도 본다.

6. 그동안 속으로 계속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며 스스로 되새김질한다.

7. 못할 것 같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크다. 원래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아무도 안 시킨 리뷰 만 자 쓰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마감 기일이 정해진 레포트 다섯 장 쓰는 일은 너무 어려운 거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리히 프롬 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할 일 목록을 열심히 적어본들 그건 결국 하지 않을 일의 목록이 된다고. 한때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맛으로 살아본 나도 체크리스트가 쌓여갈수록 부담을 느끼곤 했다. 작은 슬라임들이 뭉쳐 나를 집어삼키는 상상을 했다.


시간이 과제들의 덩치에 힘을 실어줬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서 할 일들의 중요도를 높일수록 부담이 더욱 커져갔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길수록 할 일 덩어리는 보스 몬스터에 가깝도록 몸집을 키워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취업은 너무 중요하니까 신중하게 발을 떼야할 것 같고, 할 일이 많아 보이니 일단 미루고 싶고, 미루고 중요하고 미루고 중요하다 보니 내 안에서 움직이기 힘든 거대한 바위가 되어있었다. 나도 안다. 막상 시작하면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토익 시험이 그랬듯이.


하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롤러코스터를 타기 직전 가장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늘 예전의 기억에서 힘을 얻어 부스터를 얻는다면 참 좋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선순환을 체화한 긍정맨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커 보이는 그림자에 겁먹고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이제야 조금 힘이 생겨 '할 일'을 마주할 용기라도 생겼다. 할 일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끊임없이 저거 좁밥이라고 별 거 아니라고 되뇐다. 최대한 아무 생각 없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냥 몸을 움직여볼 때도 있다. 만능은 아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하기 싫고 무서워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내 목표일을 열흘 넘겨 작업을 끝냈으니까.


그래도 알게 뭐람. 결국 난 했고, 했으면 됐다. 일을 마치면 이 정도로 배짱을 부려줘야 한다. 난 여전히 일하기가 싫고 시작이 무섭다. 그래서 출발하지 못하는 것보단 늦게라도 마치는 게 낫다며 이렇게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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