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을 높이 날 거위가 되어
3년 전 겨울,
확장 이전 오픈을 준비하던 날, 먼지로 뿌연 식당 안에 그녀가 들어섰다.
어둡고 탁한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작은 불빛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삼십대 후반,
한국에서 요리 경력을 쌓은 뒤 세비야로 건너와 스페인 요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며,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이해하고 시험까지 치르는 건,
결심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꼭 필요한 인력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가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작은 디딤돌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지치는 날도 한 번 내색하지 않았다.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하루에 세 시간, 많아야 네 시간 자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고,
피곤한 얼굴에도 에너지가 넘쳤다.
안쓰럽기도 했고,
때로는 ‘저러다 포기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끝내 낯선 언어의 벽을 넘어, 모든 과정을 자기 속도로 완주해냈다.
“세비야야, 잘 있어!”
그렇게 밝게 인사하고 톨레도로 실습을 떠난 그녀가,
몇 달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비자가 끝나기 직전이었고,
한 걸음만 늦어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벼랑 끝이었다.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돌아와.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세비야에서 다시 찾아보자.
안 되면, 우리 식당으로 먼저 비자 신청해도 되잖아.”
늘 단단해 보이던 그녀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온 그 밤,
펑펑 울며 밤을 지새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내가 누군가의 단단한 배경이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자 만료까지 2주도 남지 않았을 때,
그녀는 세비야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했다.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렸고,
결국 세비야에서도 꽤 이름 있는 곳에 채용되었다.
다시 웃는 그녀를 보며,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늘 감사했어요.
오늘은 제가 준비한 음식이니까, 마음껏 즐겨주세요.”
불빛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 날,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참 행복했다.
그녀는 ‘열심히’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진심을 다해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내 안에 작게 타오르던 불씨가, 다시금 세차게 살아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나는 다시 ‘꿈’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었다.
내 꿈을 지지해주는 지금의 남편 덕분에,
언어도 마음도 쉽사리 닿지 않는 이 낯선 땅에서
나는 오늘도 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동생은, 요즘도 내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넌 사는 것보다, 일하는 데 더 진심인 사람 같아.”
(Pareces alguien que no trabaja para vivir, sino que vive para trabajar.)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었지만 마음속은 조용히 흔들렸다.
정말 그럴까,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일에 몰두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여전히 오늘의 햇살 아래, 느릿하게 커피를 마시고
내일은 내일의 바람에 맡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걷고 있다.
커피 향에 잠시 웃음 짓다 문득, 마음 한구석이 시려온다.
가끔은 슬프다.
놓쳐버린, 빛났어야 할 내 시간이 떠올라서.
그러면 어김없이,
그 시절의 나에게 나는 화가 난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
견디는 법을 배우며 지나온 시간들이,
나를 안에서부터 단단하게 빚어놓았다.
아직은 낮은 땅 위지만, 나는 천천히 준비 중이다.
머지않아,
나만의 속도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높이까지 날아오를 것이다.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 수 있다.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을 테니까.
— 인순이, 「거위의 꿈」
�연재 예고
� 루나의 세비야
다음 주 화요일, 6월 17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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