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달라도, 마음은 같은 식구(食口)

같은 언어보다, 같은 식탁이 먼저였다

by luna Han 윤영

나는 ‘가족’이라는 말보다 ‘식구’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내 가족’보다 ‘내 식구’라고 말할 때,

어딘가 마음이 먼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가며

하나씩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식구’들이다.

함께 밥을 나눠 먹고, 일상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언어 없이도 식구가 되어간다.


리까르도는 6남매의 장남이다.

한국 같았으면 장남이라는 말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책임과 무게가 있겠지만,

이곳 안달루시아에서 가족은 ‘짊어지는 짐’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모두 도보 거리 안에 산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일상처럼 왕래한다.

우리는 외곽에 살지만, 차로 20분 거리.

이곳에서 그 정도 거리면, ‘멀다’고 말하지 않는다.


편하게 시간이 되는 가족들은 더운 여름 주말, 우리 집을 찾는다.

아니, 우리 집 수영장을 찾는다.

그리고 함께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도와주고,

**“잘 먹었어. 고마워.”**라는 말을 잊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가족들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들은 그저, 나의 일상에 스며든다.


“루나, 김치 있어?”

이제는 나의 김치가 맵다고 하면서도 맛있다며 먼저 찾는 가족들.

그 안엔 ‘네가 내 삶에 자연스럽게 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 김치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여기서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요리가 된다.


나에겐 너무 익숙해서 평범했던 무언가가,

이곳에선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특별함이 되었다.


그 순간, 나도 훌륭한 한국 문화 전도사가 된다.

서툰 스페인어로 하나씩, 김치와 밥, 설날과 세배, 찜질방과 가족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방인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전하는 사람으로.


스페인엔 추석도 설날도 없다.

하지만 성탄절과 12월 31일 밤만큼은 가족이 하나로 모이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그날엔 누구도 늦지 않고, 누구도 빠지지 않는다.

각자 냄비 하나, 접시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온다.

작은이모는 해산물 수프를, 형수는 아몬드 수플레를, 조카들은 turrón 한 봉지라도 꼭 들고 온다.

말보다 눈빛이 먼저 밥상에 도착한다.


한국에는 아직도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만,

이곳에서 가족이란 누군가를 돌보는 의무보다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일에 더 가까웠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준비해도,

그건 역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래서 세비야의 대부분 레스토랑과 마켓, 작은 상점들까지도

12월 24일 저녁과 31일 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일하지 않고, 모두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이 이 도시의 상식이다.

문 닫힌 가게들 사이로 흐르는 조용한 거리 위에는—

오히려 가족들에게로 향하는 사람들의 환한 미소가 거리를 채운다.


스페인 요리사로 초빙되어 한국에 머물던 그가,

한 달간의 휴가를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12월이잖아. 가족과 보내야지.”


결혼 전, 나는 그와 함께 처음으로 세비야를 찾았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나를 위해 일부러 매운 스페인 요리를 만들어주는 가족.

내 입맛엔 조금 낯선데도,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맛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 인생에 말이 통하지 않는 식구가 생겼다는 것.

하지만 꼭 말이 아니어도, 눈빛으로, 미소로, 마음으로 전해지는 정다움이 있다는 것.


그건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상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남편 하나 믿고,

비행기로 하루를 꼬박 날아와야 하는 이 나라로 나를 이끌었던 건—

바로 그 다정함이었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마음이 먼저 식탁에 도착한다.

그건 오래된 요리보다, 새로 만난 사람에게 더 따뜻하게 전해진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할 수 있다는 것.

그걸 식구들에게서 먼저 배우게 된 나라.

스페인은 그런 나라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 연재 안내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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