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으라 말하는 도시에서, 나는 오늘도 기준을 닦는다.”
세비야에 산다는 건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요즘, 점점 괄괄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식당을 운영하며 가장 자주 마주하는 건 ‘기준’ 없는 일상이다.
직원들 대부분은 남미 출신이고, 세비야 토박이는 드물다.
이곳에서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남편이 아는 백 년 된 레스토랑도, 결국 인력난으로 문을 닫았다.
우리 식당도 다르지 않다.
주방의 보조 직원들은 야채를 씻지 않고, 그릇은 거칠게 헹궈져 돌아온다.
워크인 냉장고 문은 열려 있고, 나는 그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너희 집에서는 요리할 때 야채를 안 씻니?”
질문은 매번 같았고, 대답도 매번 같았다.
“아니요, 씻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씻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닫아달라고만 오늘 여섯 번째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닫는다.
문을 닫고 나면, 다시 열려 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장이 아니라 냉장고 문지기처럼 느껴졌다.
한숨이 깊어지는 오후, 시에스타 시간에 경이가 식당에 들렀다.
세비야에서 꽤 알려진 스페인 레스토랑의 셰프.
20년 가까이 한국에서도 요리를 해온 사람이다.
우리 식당에서 일할 때는 누구보다 깐깐한 동료였다.
“우리도 똑같아. 소스는 상하고, 냉장고 온도는 올라가고, 매번 말해도 바뀌지 않아.”
경이는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냥… 마음을 내려놔야 해.”
그녀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슬펐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20년 가까이 한국에서도 요리만을 해온 전문가였고,
우리 식당에서도 누구보다 깐깐하게 일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그녀가 ‘그냥 내려놔야 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 의외의 대답에, 나를 내려놔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날.
주방에 들어섰을 때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음식을 만지는 손에 배어 있을 향이 너무 강했다.
나는 또다시, 모두를 불러 모았다.
향수, 야채, 냉장고, 설거지, 쓰레기.
같은 말을, 같은 상황에, 같은 얼굴로 또 하고 있다.
다만 하루가 지날수록, 내 표정만 변해간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
“No sabía.”
몰랐어요.
“No pasa nada.”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
이곳은 학원이 아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을 모른다고 말하고,
그 결과를 ‘괜찮다’고 넘긴다.
나는 괜찮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해야 한다.
식당이 팔리기 전까지,
나는 이 기준을 지킬 것이다.
아마도,
이런 기본적인 사소한 일에 매일같이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식당을 매각하려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친 게 아니라,
나를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비야에서 살려면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지만,
나는 오늘도, 그 말을 눈을 부릅뜨고 미뤄두기로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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