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로는 딱 맞게 담아낼 수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정(情)’**이다.
국어사전에는
‘사람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마음이나 애틋한 마음’ 이라고 되어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정은 그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오래 묵은 감정이다.
“따뜻한 마음”이라 하기엔 너무 가볍고,
“애틋한 마음”이라 하기엔 너무 일방적이다.
정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시간 속에 천천히 스며드는 감정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눈을 맞추는 순간, 마음 깊숙이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챙기게 되는 마음.
서운해도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
끊고 싶어도 끊기지 않는, 오래된 끈 같은 감정.
쵸코파이 광고 속 “정”이 괜히 오래 기억되는 게 아니다.
정은 과자 한 조각 안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이건 내 선물이야” 하고 김치 통을 내미는 조용한 손짓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날, 마리아가 식사를 마치고 김치를 사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친구에게 선물이라 말할까, 손님이니 돈을 받아야 할까.
결국 포장해 건넸다.
“이건 내 선물이야.”
입가에 말을 더 얹지 않고,
그냥 포장을 그녀 손에 꼭 쥐어주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다 전해졌기를 바랐다.
친구라는 이유로 그냥 줄 수 없고,
손님이라는 이유로 계산서를 꺼내기 망설여지는 사이.
마음은 이미 건네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마음에 어떤 값을 붙여야 하는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곳의 언어로는, 그런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 감정을 딱 맞게 담아낼 단어도 없다.
그나마 가까운 건 다음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 cariño (따뜻하고 친근한 다정함)
• afecto (오랜 시간 쌓인 감정적 애착)
• aprecio (존중과 애정이 섞인 호감)
하지만 정은,
그 모든 단어를 다 모아도
어딘가 조금은 비어 있는 감정이다.
정은 사랑처럼 뜨겁지도,
우정처럼 가볍지도 않다.
더 조용하고, 더 깊고, 더 오래 남는다.
정은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음,
마음과 마음이 닿은 순간,
그냥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마음.
⸻
언젠가 말없이 건네 받은 이 따뜻한 무언가가,
따스함으로 당신 마음에 오래 머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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